연구실 문이 열리고 장난끼 가득해 보이는 얼굴의 곱슬머리 의사가 고개를 내밀었다. 문 안쪽에는 의과대학 교수 연구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 펼쳐졌다. 프라모델과 피규어(영화·만화·게임 등의 캐릭터를 축소·재현한 인형)가 책장에 가득했다. 공상과학과 판타지가 주를 이루는 영화 DVD도 한 가득 있고, 온갖 항공기 모형과 전투기, 로봇 장난감이 기세등등하게 자리를 차지했다.
◆창의적인 재건 성형의 매력
경북대병원 성형외과 정호윤(43) 교수는 '상상, 그 이상을 현실로 만들고 싶은 의사'다. 혈관기형과 흉터라는 두 가지 큰 주제를 연구하는 그는 '남들이 안 하는 걸 더 하고 싶고, 기왕에 하는 거라면 남들과 다르게 하고 싶은', 한 마디로 개척자 의사였다.
인터뷰 취지를 설명하자 그는 2시간 남짓 이어진 대화를 거의 질문없이 주도했다. 마치 잘 짜여진 한 편의 드라마 줄거리를 들려주듯 자신이 걸어온 길과 인간 관계의 그물망 속에 얽히고설킨 사람들, 앞으로 걸어가야할 모습까지 차분하게 들려주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요? 의대 입학부터 이야기를 풀어보죠." 2005년 작고한 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정 피부과 원장이었다. 자신이 졸업한 경북대 의대에 대한 자존심이 대단했다. 서울대 물리학과를 희망하던 아들이 기대에 약간 못미치는 대입시험 성적을 받아오자 오히려 껄껄 웃으며 "그럼 잘 됐다. 경북대 의대에 가거라" 할 정도였다. 서울대 진학하면 등록금을 안주겠다는 엄포(?)에 못이겨 선택한 의대. 논리와 상상, 추론을 즐기는 그에게 암기 투성이 의대 공부는 적성에 맞지 않았다. 기대했던 '우수한' 성적이 아니라 '우스운' 성적으로 졸업했다. 야학도 해보고, 민주화 시위에도 나서봤다. 술을 마시며 자아의 본질에 대해 고민도 했던 시기였다.
뒤늦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친 뒤 인턴이 되면서 본격적인 진로 고민을 시작했다. 아버지의 유명세 탓에 당연히 대학에서는 피부과를 지원할 줄 알았다. 하지만 피부과도 그가 희망했던 이비인후과도 아닌 성형외과를 택하게 됐다. 이유는 매력적이어서. "모든 상처는 성형외과를 거칩니다. 특히 원래 모습을 되찾아주는 재건성형은 아이디어와 창의성이 꼭 필요한 멋진 분야였습니다."
◆인생의 전환점이 된 하버드의대 연구원
레지던트 2년차 시절, 타 전공에는 없는 성형외과만의 독특한 전통(?)에 따라 실험실에서 서너달을 보냈다. 길지 않은 이 시기가 그에게 성형외과의 새로운 멋을 알게 했고, 인생을 바꾼 중요한 계기가 됐다. 의학전문지에서 당시만 해도 용어조차 낯설던 '조직공학', '재생의학'을 다룬 짧은 칼럼을 접했다. 상처 부위를 치료하기 위해 자신의 멀쩡한 피부조직을 떼내는 대신 세포조직을 배양해 손상 부위를 낫게 할 수 있다는 것. 1988년 미국에서 처음 시작된 이 분야를 배우기 위해 그는 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피부배양의 세계적 권위자가 있던 일본 구루메대학 병원에서 짧은 연수를 마친 뒤 2000년부터 2년간 미국 하버드의대에서 연구의사로 근무하게 됐다. 지식을 배운 동시에 인생의 지향점을 설정한 중요한 시기였다. 피부배양의 최고 권위자인 하워드 그린 박사, 성형외과 의사면서 첫 신장 이식수술을 성공해 노벨상을 받은 조셉 머레이 박사, 혈관신생분야의 최고 권위자인 주다 포크맨 박사 등과 교분을 쌓고 많은 가르침을 얻었다. 그가 연구원으로 참여했던 한 프로젝트 연구는 '네이처 바이오텍' 표지에 실리기도 했다.
"세계적 대가들의 공통점은 한 분야만 끈질기게 파고든다는 점입니다. 연구도 유행에 따라서 이리저리 쏠리는데, 이 분들은 마치 산 속에 은둔한 무림 고수처럼 제 갈 길만 묵묵히 걷더군요." 지금도 이들과의 교분은 그의 연구에서 큰 힘이 되고 있다.
2002년 경북대병원으로 돌아온 그는 곧바로 연구실을 만들었다. 지금은 연구원 4명을 갖추고 적잖은 연구비를 지원받고 있지만 처음엔 연구비도 확보하지 못해 갖은 고생을 했다. 그가 택한 2가지 주제 중 하나인 '혈관기형'을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다.
◆혈관기형과 흉터 정복에 나서
"혈관이 제멋대로 불거지고 튀어나와 기형적인 모습을 띠게 됩니다. 피부는 부풀어오르고 환자는 남들의 시선이 두려워 바깥 출입도 못합니다. 아직 동양인은 유병률이 얼마나 되는 지 통계조차 없는 질환이죠." 혈관기형을 연구·치료하는 센터는 미국, 유럽에만 있을 뿐 아시아에는 한 곳도 없었다. 그나마 우리나라에선 삼성의료원이 '혈관기형클리닉'을 운영하고 있었다.
"의사들조차 내팽개쳐둔 병이었습니다. 치료해도 곧잘 재발하는데다 당장 생명에 지장이 없으니 무관심했던 거죠. 특히 혈관기형은 특정 과에서 치료할 수 없습니다." 동료 교수들이 힘을 합치기 시작했다. 삼성의료원보다 뒤늦었지만 팀워크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무엇보다 병리와 실험을 함께 할 수 있었기에 혈관기형의 다양한 원인을 찾아내고 그에 맞는 치료법도 찾을 수 있었다.
"의사조차 잘 모르는 질환이다보니 원인과 증세 파악도 쉽지 않습니다. 우리 병원 혈관기형클리닉은 성형외과, 정형외과, 혈관외과, 피부과, 영상의학과, 핵의학과 등 6개 분야 전문의들이 함께 모여 정확한 진료법을 찾습니다." 2003년만 해도 한 달에 10명도 채 안 되던 환자는 지금 10배 이상 늘었다. 지금까지 수술한 환자만 1천200례를 넘겼다. 서울, 경기는 물론 전국에서 찾아온다.
아울러 그는 흉터없이 치료하는 재생의학도 꾸준히 연구하고 있다. 상처가 생겼을 때 흉터가 남지 않도록 하는 것 뿐 아니라 이미 생긴 흉터를 원래 피부로 바꿔주는 방법도 연구 중이다. 지난해 미국 연구팀과 함께 '국제재생의학연구소'(JIRM)도 만들었다. 이미 기술적인 부분은 완성됐다. 화상 환자를 대상으로 피부 재생 임상시험도 계획 중이다. 흉터가 사라질 날도 머지않아 보인다.
마치 공상과학영화같은 일도 꾸미고 있다. 포스텍 연구팀과 함께 신체 장기를 외부에서 장기 보관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 "장기를 오래 보관하려면 피가 돌아야겠죠. 혈관이 있고, 피도 흐르는 장기 보관장치를 개발할 생각입니다." 만약 이런 일이 가능해진다면 장기이식 분야의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된다. 유난히 비행기 모형을 좋아하는 정 교수. 그에게 비행기는 바로 '상상력의 원천'이었다.
글·사진=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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