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품은 칼날 같은 마음 그 누가 풀어줄 수 있으랴. 하늘마저 이미 끝나고 말았으니 죽지 않고서 무엇을 또 할까. 내가 죽지 않고 있으니 향산 옹이 빨리 오라 재촉하네.'
동은 이중언 선생이 남긴 '술회사'(述懷詞)이다. 나라가 망하자 향산 이만도는 24일 단식 끝에 순절했다. 향산의 죽음에 집안 조카였던 이중언과 제자 벽산 김도현, 봉화 선비 이면주 등 숱한 이들이 목숨 던져 '의로움'을 따랐다. 이들의 죽음은 나라 잃은 동포들에게 쉽게 꺾이지 말고 뜻을 세워 맞서 싸우라는 엄중한 가르침을 전했다.
◆향산을 잇는 사람들
유교적 삶을 살면서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며 명문거족이 많았던 안동문화권 사람들의 나라사랑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단연 빛나고 있다. 항일투쟁기 중 가장 극적인 투쟁은 자정순국이었다. 일제통치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가장 극렬한 저항이 목숨을 끊는 항쟁이었다. 1910년 8월 29일, 국망 이후 향산의 자정순국은 안동권 사람들의 순국을 이끌었다. 향산이 순국하기 하루 전이었던 10월 9일, 와룡 살던 권용하가 기둥에 머리를 부딪쳐 절명했다. 향산이 순국하던 날 집안 조카였던 이중언이 단식에 나서고, 9일 뒤인 10월 19일 봉화 이면주가 음독 순국했다. 풍천의 이현섭도 단식해 11월 26일 순절했다. 풍산의 소산 김택진도 단식 대열에 동참해 11월 28일 만 36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했다. 향산의 제자 벽산 김도현은 1914년 12월 23일 영덕 대진 바닷가로 걸어 들어가 순국했다. 이후 1919년 3월 3일, 3·1만세운동 때는 1910년 국망의 해 11월 27일 단식순절했던 류도발의 아들 류신영이, 1921년 1월 27일 광무황제 대상 다음날인 28일에는 이명우·권성 부부가 음독 순국했다. 이들은 '의'를 걸었던 향산을 따라 '의리'와 '저항'을 죽음으로 보여줬다.
안동독립운동기념관 강윤정 학예실장은 "유교적 삶에 바탕을 둔 안동 지역 유림들은 나라와 군왕의 위기시대에 으뜸을 '의'에 두었다. 향산의 단식 소식에 안동을 비롯한 봉화·영양 등 안동문화권 선비들의 단식과 순국이 잇따랐다. 모두가 향산의 '의'를 따른 것"이라고 했다.
◆이중언 '사생취의'(捨生取義), "겨레여 꺾이지 말라"
'사생취의'(捨生取義). 퇴계의 13세 손으로 태어난 동은(東隱) 이중언(李中彦·1850~1910)은 집안 숙부인 향산이 순국했다는 소식에 곧바로 음식을 끊었다. 단식 다음날 이중언은 '경고문'(警告文)을 지었다. "나라가 무너진 마당에 오직 나아갈 길은 사생취의, 목숨 던져 의로움을 택하는 것뿐"이라 했다. 그는 자신의 한목숨 던져 의로움을 세울 것이니 쉽게 꺾이지 말고 뜻을 세워 맞서 싸울 것을 동포들에게 경고했다.
그는 1881년 만인소를 올려 나라가 잘못되고 있다고 지적했고, 1895년 의병을 일으켜 싸워도 보았다. 1905년 을사늑약에 '을사5적의 목을 베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끝내 나라가 무너졌다. 그는 자신이 택할 길은 오로지 '의리'뿐이라 생각했다. 밥을 거절하고 미음만 먹었다. 향산의 순국 소식이 들려왔다. 선생은 통곡하면서 몸을 씻고 조상들의 사당과 묘소에 나아가 절을 올리고 돌아와 미음마저 끊었다.
향산을 태운 상여가 마을로 들어오자 시신을 부둥켜 안고 "숙부 잘 돌아가셨습니다. 조카도 마땅히 숙부를 따르겠습니다"고 통곡했다. 울면서 말리는 아들에게 "향산의 아들 중업을 보라"고 나무랐다. 단식 중에 손자가 요절했다. 며느리 박 씨를 불러 위로했다. 하지만 단식을 그만둘 수 없었다. 동은은 단식 27일 만인 11월 5일 오후 6시 무렵 세상을 떠났다. 그는 가족과 후세들에게 겉봉투에 '봉'(封)이라 적은 경고문으로 죽음의 교훈을 남겼다.
이중언의 증손자 이동일(68)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부회장은 "국치 100년을 맞아 순국자들의 뜻과 정신을 되새겨야 한다. 정부, 국민이 힘을 모아 다시는 부끄러운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순국자들의 발자취에서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김도현 '천추대의'(千秋大義), "내 시신을 찾지 말라"
'천추대의'(千秋大義). 향산의 제자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1852~1914)이 바다로 걸어 들어가 순국했던 영덕군 영해읍 대진해수욕장에 조성된 '도해단'(蹈海壇)에는 벽산의 의로움이 묻어있다. 김도현은 바다로 걸어 들어가 숨진 '도해순국'으로 향산을 따랐다. 단식 소식을 듣고 찾아가 만난 향산과는 이심전심이었다. "선생을 따르겠습니다" "자네에게는 어른이 있지 않은가?" "그럼 나중에 따르겠습니다" 향산이 "벽산! 잘 가세"라 하자 벽산은 "선생님, 그럼 쉬 뵙겠습니다"라 했다. 짧게 주고받은 말이었지만 숨은 뜻은 강하고 결연했다.
그렇게 만난 지 4년 만인 1914년 12월 22일 벽산은 영양 집을 나섰다. 이튿날 23일 영해 바닷가에 나서 "동해에 죽어 기어코 왜적을 멸망케 하리라"는 글을 남기고 차디찬 바닷물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 순국해갔다. 따라온 조카에게는 "내 시신을 찾지 말라"고 했다.
벽산이 동해 바다로 걸어 들어간 그곳에는 '도해단'이 조성돼 있다. 1971년, 고(故) 박정희 대통령이 '천추대의'(千秋大義)라는 친필을 올렸으며 돌에 새겨 비를 세웠던 것. 이곳에서는 해마다 선생을 추모하는 전례행사가 봉행되고 있다.
벽산 김도현 선생 숭모회 김하식 회장은 "무엇이 기개이고 절의인지 보여주었다. 벽산 선생은 왜 우리가 남의 종으로 살아갈 수 없는지를 온몸으로 보여주고 외치고 순국해 가셨다"고 했다.
안동·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취재도움=안동독립운동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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