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아름다운 후진

며칠 전 잠깐 볼일 보러 나갔던 사람이 한참 뒤에야 잔뜩 열이 나서 돌아왔다. 영문인즉, 비좁은 길에서 앞서 가던 차가 마주 오던 차와 딱 마주쳤는데 가만히 보니 앞에 가던 차가 뒤로 빼주는 것이 상황적으로 맞을 것 같아서 더 이상 진행시키지 않고 멀찍이 기다렸는데 정작 앞에 있던 차는 꼼짝도 하지 않더란다. 한참을 마주 보며 서로 신경전을 벌이는 와중에 뒤에서 빵빵거리며 오던 차 두 대가 얌체같이 그가 비워놓은 앞자리로 끼어들어 결국은 비좁은 골목에서 차들이 앞뒤로 겹겹이 붙어서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고. 그러고도 한참을 대치하다가 맨 앞차부터 새치기했던 두 대의 차, 영문도 모르고 뒤따라 붙었던 차들까지 줄줄이 후진하여 마주 오던 차를 먼저 보내고서야 좁다란 그 길을 겨우 빠져나갈 수 있었다는데 지나고 보니 10여 분 이상이 훌쩍 지나 있더란다.

대장내시경을 하다 보면 길이 코앞에 보이는데도 진입이 안 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대장내시경은 전진만큼 후진이 필수적인 검사이다. 아래 부위에서 이미 꼬일 대로 꼬여버린 장은 절대 전진을 허락하지 않는다. 바로 그럴 때, 부드럽게 틀면서 줄을 뒤로 슬쩍 빼주면 완강하게 버티던 내시경 선단이 알파인 활강을 하듯 쓱쓱 나아가 단숨에 목표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이런 기술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무리한 전진만 시도하다가 검사에 실패하든가, 우여곡절 끝에 성공하더라도 피검자의 뇌리에 대장내시경이란 두 번 다시 하지 못할 고통스러운 검사라는 기억을 심어주게 된다. 우리네 삶에서도 그렇다. 굳이 전진이 목적이 아니더라도 관계의 완성을 위해, 존재의 맞닿음을 위해 기꺼이 물러서야 할 때가 있다.

친구 간이든, 부부 사이든, 부모 자식 간이든 피치 않게 언쟁이 깊어지거나 감정의 핏대를 세워가며 싸우게 될 때가 있다. 이쯤에서 멈추어야 하는데 너무 멀리 가는 경우가 있다. 자존심 때문에 혹은 서운하고 미운 마음에 그만 끝까지 가버리곤 회복 불능의 상태가 되는 경우를 종종 본다. 돌이켜보면 꼭 필요할 때 한 걸음 뒤로 물리지 못하고 부득부득 나아갔다가 낭패를 본 경우가 어디 한두 번인가.

이기는 것이 유일한 목표인 전쟁터에서도 후퇴가 필요한데 하물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어깨 맞대고 살아가는 우리들 삶에서야 말하여 무엇할까. 보이지 않는 욕망에 사로잡혀 앞으로만 달려가는 나로 인하여 누군가 뒤에서 울고 있다면, 소중한 무엇인가 흔들린다면, 무너져 내린다면, 한번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지금이야말로 한 걸음 뒤로 물릴 때가 아닌지. 뒤로 물릴 때 비로소 나아가기도 한다.

원 태 경 내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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