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700자 읽기] 아주 작은 아침

서하 지음/시안 펴냄

▨아주 작은 아침/서하 지음/시안 펴냄

'시장 안 참기름 집/꾹 다문 샤시문에 공고가 나붙었다/개인사정으로 메칠간 문 닫슴니다 제송함니다 주인백/천안함 사고로 생떼 같은 아들 잃었단다/참깨 볶던 솥만 퀭하다/몇 년 전 친구에게 빚보증 서주고/자신이 빚쟁이 되어버린 후/끈적한 그 빚 지우려고/밤낮 눈에 불 켜고 살았단다/잔뜩 웅크린 집에도 빛이 들까'-불 켜지 않아도 아침은 환하다-중에서.

때로는 한 줄의 사연이 몇 권의 시보다 깊은 울림을 줄 때가 있다. 이 시가 그렇다. 짤막한 몇 줄의 시가 한 사람의 삶을 저리도록 통절하게 이야기한다.

시인은 무덤덤하게 말하지만 그 언어들은 저절로 이야기를 만든다. 슬프고도 애절한 이야기를 무덤덤하게 뱉어놓을 줄 아는 재주, 그럼으로써 더 감동을 주는 이야기 방법이다. '스무날 어느 봄날 시집와 이제사 팔뚝에 긴 뿌리가 났네/링거줄에 감긴 환한 밤/푸른 빛은 이제 그늘이 되지 못하고/어둠의 새순들/슬금슬금 허공으로 기어가네' -기별- 중에서.

그의 시에는 화투를 즐겨 치던 아버지의 모습이 연작으로 등장한다. 수학여행 가려고 깨 한말을 아버지 몰래 숨겨두었지만 아버지가 화투판으로 가져가버린 일, 첫딸이 7월 29일 태어나자 끗발 튄다며 바로 화투판으로 달려간 아버지, 그 아버지를 찾아 헤매던 어린 시절 시인의 모습까지 시인의 언어를 거치면 시로 거듭난다. 127쪽, 8천원.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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