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곤파스'가 가을 농사를 망쳐 놓았다. 어항에 묶어둔 배들도 난파선처럼 못 쓰게 만들었다. 도시의 간판들이 날아가고 전봇대가 넘어져서 정전 소동을 겪었다. 이런 소식을 으레 '그러려니' 하고 들어 넘기지만 그 피해는 드러나지 않은 곳에서 막심하다. 정전 소동 하나만 보자.
어디서 정전되었다고 하면 '촛불을 켜야 하니 불편하겠구나' 또는 '냉장고 음식이 상하겠네' '선풍기를 돌릴 수 없어서 무지 덥겠다!' 하는 수준으로 이해하고 말 수도 있지만 가정의 모든 살림살이 체계가 가전제품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피해는 훨씬 크다고 할 수 있다. 어둠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 밥을 지을 수 없고 텔레비전을 볼 수 없으며 컴퓨터 접속도 불가능하다.
정전 탓에 이 정도 불편을 겪는 것은 '옥에 티' 수준이다. 단순히 겪는 정전 하나로 평생 일구어 놓은 재산을 모두 날리거나 파산의 충격을 입어야 하는 사람들이 있는 까닭이다. 어느 양계장은 정전 3시간 만에 11만 마리의 닭이 폐사하여 10억 원의 피해를 입었고 어패류 가게들은 활어가 있는 수조 냉각기가 작동을 멈추는 바람에 270여 개 점포에서 6억 원의 재산 피해를 입었다. 복구 불가능한 엄청난 피해지만 보상의 길조차 없다. 이처럼 정전의 나비효과는 태풍의 직접 피해 이상의 가공할 파괴력으로 피해를 증폭시킨다.
외교통상부장관 딸 특채도 직접 효과만 따지면, 장관 부녀의 사퇴와 인사 담당자 징계로 수습과 복구가 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특채의 나비효과는 사회 구석구석에서 큰 상처로 확산되고 있다. 외교부 특채 공모에 지원했던 사람들은 회복 불가능한 치명타를 입었다. 장관 딸을 정해 두고서 1, 2차에 걸쳐 공모하는 바람에 그때마다 여러 사람들이 서류를 갖추어 기한 내에 접수하느라 들인 시간과 공력, 경비의 낭비는 적지 않다. 지원자는 10여 명이라 하더라도 이 공고를 보고 응모 여부를 결정하기까지 수많은 사람과 그 가족들이 머리를 싸매고 마음고생을 했다. 당사자들은 전형 일자까지 가슴 졸이며 밤잠을 설쳐야 했을 것이다. 시험만큼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것도 없다. 오죽했으면 주기도문에서조차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할까.
차라리 딸을 특채하려면 꼭 집어 채용할 것이지, 마치 공정한 시험 절차를 거치는 것처럼 공모하여 죄 없는 여러 인재들을 들러리 서게 하는 것은 죄악이다. 자기 자녀의 불법 채용을 공정한 것처럼 가장하기 위해 공정성만 믿고 응모한 순진한 인재들을 한갓 들러리로 수단화했을 뿐 아니라 탈락의 패배와 좌절감까지 안겨준 까닭이다. 차라리 내정자가 있다면 공채를 거치지 않고 정실 인사를 하는 일이 더 낫다. 특정인을 내정해 두고 공채 절차를 밟는 거짓 인사야말로 공정성의 탈을 쓴 가장 악덕 인사 행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일부 인사들은 이 문제를 매우 안타까워한다. 외교관 아버지를 따라 여러 나라 문물과 외국어를 잘 익혔을 터인데 그 능력을 외교 역량에 쓰지 못해 아쉽다는 것이다. 자녀로서 경험과 능력이 아깝다는 주장은 타당한가. 상황을 국방부장관이나 대통령으로 바꾸어 놓고 보자. 국방장관 자녀들은 일찍부터 관사 생활을 하며 군대 문화를 익혀 군대 생리를 잘 알기 때문에 국방부에서 일해야 할 것이다. 청와대에서 생활한 대통령 자녀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 경험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아예 청와대에 남도록 해야 할 것이다.
왜 자녀들만인가. 자녀들은 간접경험일 뿐 직접 그 일을 수행한 당사자는 더 탁월하다. 대통령 경력자만큼 대통령 직무를 잘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따라서 대통령이든 장관이든 모두 일정한 임기 없이 종신토록 하다가 자녀들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것이 효율적이다. 이런 주장이 정당하고 타당한 것인가. 이것은 전근대적 음서 제도 이전의 봉건 체제인데 여전히 이런 봉건적 발상으로 세습제를 지속하는 체제가 북한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도 부자 중심의 세습적 인사 체제를 잘 작동시키는 부처가 외교부이다. 그래도 외교 장관과 담당자들을 북조선으로 가라고 하는 것은 지나치지 않을까, 아무리 장관 말씀이지만.
임재해(안동대 교수·민속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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