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자정순국 100년] <4>향산을 잇는 사람들②

남편은 '義의 길'을 따르고 아내는 '義婦의 길'을…

경술년 국망 이후 향산을 따라 마지막 '의'를 죽음으로 실천했던 순국자들은 관직의 높고 낮음, 벼슬길 진입 여부, 남녀가 따로 없었다. 관직에 나섰던 이들은 임금에 대한 '충'과 대부로서의 '의', 그렇지 않았던 선비들은 옳고 그름에 대한 유교적 가풍이 있었다. 순국행렬은 한사람 한사람 의로움의 선택도 있었지만, 의로움을 좇았던 아버지를 따라 순국했던 '부자순국', 충의의 길을 선택했던 남편을 따라 의부의 길을 선택한 '부부순국'도 있었다. 아버지를 따르고, 남편을 따라 목숨을 버렸던 이들에게도 바르지 못한 세상에서 혼자 남아 살아가는 게 의미없는 일이었다.

◆부자순국(父子殉國)-류도발·류신영

안동시 풍천면 하회마을의 류도발·류신영 부자는 서애 류성룡의 10·11세손이다. 이들 부자는 관직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퇴계학을 계승한 선비들이었다. 그들은 '위정척사'라는 틀 위에서 퇴계에서 시작해 서애로 이어져 내려온 가학(家學)을 잇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죽음에 이르자 스스로 몸을 숨기고 살았다. 하지만 그들은 끝내 잘못된 세상의 모든 것을 인정할 수 없다며 스스로 음식을 끊거나 음독 순국해 갔다.

류도발(柳道發·1832~1910)은 '성학의 도'를 중하게 여겼다. 옷이나 풍속을 바꾸는 개혁, 일본에게 문을 열고 그들의 옷을 입고 머리모양을 바꾸려는 변복령(變服令)을 당연히 반대했다. 그는 세상이 어지럽게 변하자 의성 신평 덕암으로 들어갔다. 그렇다고 어지러운 세상을 피할 수 없었다. 1910년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만도와 이면주의 순국소식도 들려왔다. 그도 더이상 어지러운 세상에 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1910년 9월 28일 하회로 가서 조상묘소에 두루 절했다. 각 고을마다 국왕을 상징해 모셔두었던 '전패'(殿牌)가 없어졌다는 소식까지 들었다. 그는 통탄했다. "종묘사직이 망하고 전패가 훼철됐다. 더구나 세신(류성룡)의 후손이 아니더냐?". 마음을 굳혔다. 덕암으로 다시 돌아온 11월 11일, 음식을 끊었다. 남의 나라 백성되는 게 싫고, 앞으로 닥칠 해가 얼마나 될지 힘들고, 구차하게 사는 길을 찾는 것은 욕되고 욕된다는 이유였다. 11월 27일, 단식 17일째 되던 날 저녁 무렵 스스로 '향탕'(香湯·사람이 죽은 뒤 염습하기 전에 시신을 씻는 물)으로 몸을 깨끗이 씻고 편안하게 누워 세상을 떠났다. 선비의 순국 소식에 전국 유림과 선비들이 하루 동안 밥을 짓지 않는 등 애도했다. 그는 벼슬하지 않은 선비로서 대의를 실천하고 대절(大節)을 세웠던 인물이었다.

류신영(柳臣榮·1853~1919)은 1884년 갑신정변이 터지자 과거준비를 포기하고 책만 읽었다.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진 이후 호서의진과 안동의진에 나섰다. 1905년 외교권을 빼앗기자 그는 또 다시 세상과 등지고 책만 읽었다. 1910년 나라가 망하고 이만도와 이면주의 순국소식이 들리고 아버지가 단식에 들어갔다. 17일 동안 눈 앞에서 숨져가는 아버지를 지켜보았다. 3년상을 마치고 충북 보은 속리산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언제나 일제의 감시로 아버지의 뒤를 따를 날을 찾고 있었다.

1919년 1월 21일 광무황제 고종이 서거했다. 황제의 독살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광무황제 장례식날 자신의 목숨을 끊기로 마음 먹었다. 1919년 3월 3일이었다. 그 뜻을 가족과 지인들에게 알렸다. "아버지께서 의(義)에 죽기로 맹세하던 날 따라 죽고 싶었으나 임금께서 계시니 의병 일으켜 후일을 기다렸으나 임금이 독시돼 복수할 힘 없으니 구차하게 사는 게 비루하지 않는가?" 3·1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이 있던 이틀 뒤인 3월 3일 그는 자정순국했다. 류신영의 순국에 선비들은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죽고, 자식은 임금과 아버지를 위해 죽었으니 참으로 충효가세(忠孝家世)"라고 했다. 이들 부자의 위패는 전북 진안 마이산 '대한이산묘'에 모셔져 있다.

◆부부순국(夫婦殉國)-이명우·권성

안동 예안 부포동의 이명우(李命羽·1872~1921)·권성(權姓·1868~1921) 부부는 1921년 1월 28일, 고종의 대상이 끝나는 날 함께 음독 순국했다. '충의(忠義)의 길'을 죽음으로 실천했던 남편 이명우를 따라 부인 권성은 함께 죽음으로써 '의부(義婦)의 길'을 보여주었다. 부부가 함께 자결순국한 사례는 유일하다. 또 권성은 자결한 유일한 여성이기도 하다. 게다가 여성이 한글 유서를 남긴 사례도 드물다.

이명우는 1894년 식년시에 합격했지만 관직에 나서지 않았다. 고향에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가던 중 1895년 국모시해 사건이 발생했다. 애통의 세월만 흘려 보냈다. 1905년 외교권이 빼앗기고 1910년 나라가 망했다. 산 하나 넘어 청구동에서 향산선생이 단식, 순국하고 강 건너 하계마을에서 동은이 단식 순국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는 이들처럼 순국의 길을 가지 못했다. 부모가 살아계신 때문이었다. 1912년 온 가족을 이끌고 속리산 아래 갈평리로 이사했다. 1915년 부친이 세상을 등지고, 1918년 모친마저 돌아가셨다. 두 달여 뒤인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이제 어디를 돌아볼 곳이 없었다. 집에는 모친 빈소를 마련하고 집 뒤에는 황제를 모시는 단을 차렸다. 효도와 충의를 지키는 3년상을 마쳤다. 고종 대상을 마친 1월 27일 밤, 부부는 운명을 결정하기로 했다. 남편은 충을 따르고, 아내는 그 남편을 따르기로 했다. 아들 삼형제를 불러 조용히 물리치고 부부는 독을 마시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지막 가는 길에 '비통사' '유계' 등을 남겼고, 권씨 부인도 아들 삼형제에게 쓴 '계삼아'(戒三兒) 등 가족들에게 남기는 한글로 쓴 다섯 편의 유언을 남겼다.

"나라가 망하고 부모님도 돌아가시니 어디로 가야하나, 신하는 신하답고 아들은 아들답게, 불충불효면 어찌 신하요 자식일까, 이 몸 죽어 상황을 모시려 하니 이 밖에 또 무엇 구하랴"('비통사' 중에서)

충의의 길을 가려는 결연함이 그대로 느껴진다.

권씨 부인은 세 아들에게 눈물로 쓴 유서에서 "네 어르신이 평생 의리 가득하신 뜻을 이루실 듯하니 나도 같이 따르리라, 노소간에 생사가 그 한몸에 달렸으니 부부지의는 군신지의와 일반이라 무슨 한이 있으리오"라고 했다. 임금과 신하 사이에도 의리가 있듯이 부부사이에도 의리가 있으니 자신은 '의부의 길'을 가겠다는 절절함이 묻어있다.

이명우·권성 부부의 손자 이일환(77) 씨는 "두 분이 남기신 비통사와 유계 등에는 나라를 잃고 10여 년 동안 울분과 치욕을 참을 길이 없어 충의의 길을 가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면서 후손들에게는 외세의 침략과 왜적에 대한 경계와 백성과 신하된 도리를 다할 것을 경계·권고하고 있다"고 했다. 안동·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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