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주영 작 '청금정길'
유난히 무더웠던 올여름 날씨 덕분에 나비와 잠자리 등 온갖 곤충들이 제철을 만났다. '동행' 길을 떠나는 산과 들마다 가득한 곤충들은 마치 열대우림 속에 뛰어노는 양 날갯짓이 흥겹기만 하다. 강주영 화백의 그림 속 풍경은 마치 꿈속을 거니는 듯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꽃과 나비가 가득한 이 곳을 지나 저 언덕에 오르면 과연 무엇이 보일까. '청금정'을 그려놓을 줄 알았더니 파란 여백으로 남겨두었다. 저 고개 너머 고령을 감싸안은 주산과 구름 속에 너울거리며 손짓하는 미숭산이 마음 바쁜 길손을 위로하며 기다릴 것만 같다.
덜컥 겁이 났다. 덤불이 우거져 길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제법 이름난 산길이지만 한여름에 이곳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했다. 인기척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곳에서 행여 산짐승이라도 만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들었다.
길을 가득 덮은 산딸기 덤불 가시가 허벅지를 찔러온다. 꽤 오랫동안 사람이 다녀가지 않은 모양이다. 두어 걸음 내디딜 때마다 거미줄이 얼굴을 휘감는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하필 사람 얼굴 높이에 거미줄이 잔뜩 있는 것일까?
가만 보니 허리나 다리에는 거미줄에 걸린 흔적이 없다. 산짐승들이 돌아다닐 키높이에는 거미줄이 없고 날벌레들이 무심코 지나다닐 만한 높이에만 거미줄을 친 듯하다. 세심하게 거미줄을 관찰한 것이 아니니 함부로 답을 내놓을 바는 아니지만 새삼 숲과 나무와 살아움직이는 것들이 함께 호흡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두려움은 사라지고 숲은 생기에 넘쳐났다.
◆고령군서 12가지 탐방로 꾸며
청금정에서 반룡사로 가는 길. 3㎞ 남짓한 산길이지만 숨이 가쁜 오르막도 없고 다리가 휘청거리는 내리막도 딱히 없다. 오르기에 힘들어보이는 산봉우리는 둘레길을 따르게 돼 있고, 비탈진 내리막에는 행여 넘어질세라 나무계단도 만들어 놓았다.
지금 걷는 이 길은 '불귀(不歸)의 길', 즉 돌아올 수 없는 길이라고 이름 지어졌다. '잃어버린 대가야를 다시 찾을 수 없는 애절함이 서린 길'이라는 설명이 초입에 붙어있다. 고령읍 동쪽에 자리 잡은 주산(主山'310m)에서 서쪽으로 길을 잡아 능선길을 걷다 보면 미숭산(美崇山'757m)에 닿는다. 고령군은 이 길을 12가지 탐방로로 꾸며놓았는데, '불귀의 길'도 그 중 하나다.
탐방로에 오르는 출발점은 여러 곳이 있다. 대가야박물관 뒤편에서 지산리 고분군으로 올라 주산까지 이르는 길(1구간)이 그나마 편리하고, 고분군에서 내려다보이는 빼어난 전망도 감상할 수 있다. 원래 주산의 이름은 '이산'(耳山)이었다고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대가야시대에 고령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있는 금산(錦山)에서 망을 보다가 외적이 쳐들어오면 고함을 질렀는데, 이쪽에서 귀(耳)를 기울여 그 소리를 들었다 해서 이산이라고 했단다. 일제강점기에 이름이 바뀌었다고 하는데 정확하지는 않다.
주산 자락에는 수많은 고분군과 주산산성이 있으며, 거북바위에 얽힌 전설도 전해온다. 옛 대가야에는 거북을 유난히 아끼고 사랑하는 마량이라는 장군이 있었다. 번성하던 대가야가 위험에 처하게 되는데 바로 신라의 침공이다. 신라 진흥왕의 명을 받은 이사부 장군은 군사 5천 명과 함께 대가야 정벌에 나섰다. 마량 장군은 끝까지 항전했지만 끝내 포위돼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마량 장군이 죽은 지 사흘 뒤에 나뭇잎 배에 수많은 거북이 군사를 거느리고 다시 나타났다. 마침내 신라군은 마량 장군의 귀신과 거북이 군사에 쫓겨 도망하게 됐다고. 세월이 흘러 마량 장군이 죽은 자리에 이상한 바위가 솟아났는데, 그 모양이 꼭 거북이를 닮아서 '거북바위'로 이름 지어졌단다. 지금은 바위 흔적을 찾을 길이 없고, 전설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주산에서 서쪽으로 산자락을 3㎞쯤 가면 '청금정'까지 닿는다. 12구간 탐방로 중 제6구간 '눈물고개 길'이다. 나라를 잃은 대가야 유민들이 망국의 한을 안고 서러운 눈물을 떨구며 걸어갔을 바로 그 길이다. 실제 유민들이 이리로 갔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길마다 그에 걸맞은 테마를 정해놓았을 뿐. 아마 대가야의 진산인 주산을 떠날 수밖에 없는 심경을 담았으리라 짐작된다.
◆가야금 소리 듣는 정자 '청금정'
'청금정'(聽琴亭)은 이름 그대로 '가야금 소리를 듣는 정자'다. 길 안내를 맡은 이용호 문화해설사는 "청금정에 올라가면 비록 스피커지만 가야금 소리를 감상할 수 있다"고 했다. 전날 밤샘 작업으로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던 강주영 화백은 가야금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인 모양이다. 청금정 아래 주차장에서 정자까지는 600m. 오르막길이 계속된 탓에 땀이 흥건히 밸 정도다.
하지만 기대했던 가야금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강 화백은 실망한 듯 정자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비록 가야금의 청아한 소리는 들을 수 없어도 이곳에서 내려다보이는 경치는 속이 다 시원해질 정도다. 비구름 아래 습기를 잔뜩 머금어 뿌옇게 보이긴 해도 동쪽으로 봉긋하게 솟아오른 주산 정상이 손에 잡힐 듯 다가선다. 서쪽으로는 구름에 모습을 감춘 미숭산 정상이 아련하다. 청금정 아래 주차장에서 북쪽으로 난 '중화임도'를 따라 산을 내려가면 가야금과 우륵의 이야기를 담은 우륵박물관에 닿을 수 있다.
빗줄기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길을 서둘러 반룡사 쪽으로 향한다. 산딸기 덤불을 헤치고, 거미줄을 걷어가며 산길을 서둘렀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숲은 특유의 향을 내뿜는다. 사람이 만든 방향제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미묘한 그 향기. 그저 예쁘게 포장된 냄새만은 아니다. 아름드리 나무 아래 발목이 빠질듯이 켜켜이 쌓인 낙엽이 썩어가는 냄새도 있고, 빗물에 씻겨내려가는 흙에서 올라오는 내음도 있으며, 갓 잎을 피워낸 식물에선 연둣빛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묘한 내음도 묻어난다. 이 모든 냄새들이 어우러져 숲의 향기를 만들어내고, 진득하게 느껴질 만큼 공기 속에 짙게 배어나게 된다. 숲을 떠나면 그 향기가 가장 먼저 그립다.
◆이성계에 맞선 이미숭장군 기려
오르고 내리며, 좁아지고 넓어지는 숲길을 30여 분쯤 걸으면 반룡사로 내려가는 갈림길을 만난다. 여기서 미숭산까지는 1.7㎞. 고령읍과 합천군 야로면의 경계에 자리 잡고 있는 미숭산은 원래 상원산(上元山)으로 불렸다. 고려말 안동장군(安東將軍) 이미숭(李美崇)이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반대한 뒤 접전을 벌이다 순절한 곳이 바로 이 산이다. 이미숭 장군은 이 산을 근거지로 삼아 성을 쌓고 군사를 훈련해 이성계와 대항했는데, 그 절개를 기려 산 이름이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산 북쪽에는 자연휴양림도 마련돼 있다.
능선길 아래 자리 잡은 천년고찰 반룡사는 크게 화려하지 않지만 아담한 풍광을 담은 절이다. 돌에 새겨진 절의 역사를 보면, 원효대사가 중창할 때 이곳 지세가 용이 서려 있는 듯해서 '반룡사'(盤龍寺)라고 이름 지었단다. 서기 802년 가야산 해인사를 지을 때 반룡사에서 주관했다는 설도 있고,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할 때 '반룡사를 다치게 하지 마라'는 황제의 교지가 있었다고도 한다. 최근 반룡사는 한국불교문화사업단이 지정하는 '템플스테이' 운영 사찰로 선정되기도 했다.
글·사진=김수용기자 ksy@msnet.co.kr
도움말=고령군 이용호 문화관광해설사 054)950-6060
전시장소 협찬=대백프라자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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