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낙동강시대-스토리가 흐르는 마을](10)예천 새멸마을<1>

삼강주막보다 더 큰 장터 갑술년 물난리 이후 쇠락

음력 정월 열나흗날 밤 11시. 삼청당에 사람들이 몰려든다. 마을 입구 세 곳은 금줄을 쳐 놓았다. 마을에는 이제 외지인들은 물론 주민들조차 출입할 수 없다. 동네 개들도 함부로 돌아다니지 않도록 단속해야 한다.

삼청당 옆에는 당산(堂山)나무 한 그루와 조그마한 바위 두 개가 서 있다. 바위는 남자비석과 여자비석으로 불린다. 300여 년 전 새멸마을 시조가 처음 터를 잡았을 때 꿈에 한 노부부가 나타났다. 마을 입향조는 '우리를 모시면 마을을 잘 지켜주겠다'는 노부부의 말에 따라 이들의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주민들은 삼청당에 음식을 차리고, 제관은 옷깃을 여민다. 최근 부정한 일이 없었던 박 씨와 정 씨가 올해 제관으로 정해졌다. 손(따라다니며 사람의 일을 방해하는 귀신)이 없고, 흠이 없고, 액운이 없는 사람이 제관이 돼야 했다. 집안에 초상이나 해산도 없어야 한다. 박 씨는 이방구산 아래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밥과 음식을 마련했다. 제관은 목욕재계하고 흰 두루마기와 양말, 속옷까지 모두 새것으로 구했다. 조라(술)는 이미 삼청당 앞에 묻어두었다. 박 씨는 마을신(洞神)에게 술을 올리고, 정 씨는 소지(燒紙)를 맡았다. 정 씨는 흰 종이를 태워 올리며 동신에게 소원을 빈다. 군에 갔거나 객지생활을 위해 외지에 나가 있는 이들까지 모두 하나하나씩 소지를 뽑아 올린다. 마을의 안녕과 태평을 기원한다. 농사가 잘 되기를, 낙동강이 범람하지 않기를 빈다. 동제를 지내는 3시간가량 주민들은 경건함을 잃지 않는다. 짐승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보름달이 휘영청 밝게 비춘다. 마을에는 올 한 해도 풍요로움과 좋은 일만 가득할 터이다. 동제를 지낸 다음날인 정월 대보름에는 마을사람들이 모두 모여 먹고, 마시며 즐거운 하루를 보낸다. 새멸마을의 동제는 그렇게 300여 년을 이어오고 있다.

◆300년 이어온 동제

예천군 풍양면 낙상1리 새멸마을. 예천 삼강에서 합쳐진 낙동강, 영강, 이안천의 세 물길이 세차게 흐르는 곳이라고 삼여울(삼탄·三灘), 세 물길로 통한다고 삼청동(三淸洞)으로도 불렸다. 부산에서 올라온 소금배는 의성 낙동나루를 거슬러 이곳 새멸에 내렸다 다시 예천 하풍나루와 상주 퇴강나루, 문경 삼강나루로 향했다.

이방구산이 마을 북쪽을 감싸고, 낙동강이 서쪽에서 흘러내리는 새멸은 아직도 매년 동제를 열 만큼 끈끈한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다.

2008년 제관을 지낸 박천만(74) 씨는 "마을이 첫 형성될 때 입향조가 꿈을 꿨는데, 허연 옷을 입은 나이든 내외분이 '너덜은 우리를 모시면 잘 될 것'이라고 했다"며 "그때부터 마을 제사를 지낸 게 지금까지 왔다는 거지"라고 말했다. 또 "지금도 동제 지낼 때 밥을 두 그릇 떠놓는데, 이 마을이 있는 한 그 할부지 할머니는 영원히 안 굶어"라고 했다.

마을에서 액운이 없는 남자 두 명을 제관으로 뽑아 몸을 깨끗이 한 뒤 한 명은 술을 올리고, 한 명은 소지를 맡아 제를 지낸다는 것.

마을 제당, 삼청당은 1993년 지었다. 이 전까지 동제를 지낼 때 멍석으로 제상을 둘러쌌는데, 눈비라도 오면 제관이나 준비하는 이들이 고생이 심했기 때문에 제당을 건립한 것.

◆변화해 온 나루터와 장터

새멸에는 1970년대 초반까지 나루터가 있었다. 새멸 남쪽을 가로지르는 길이 강을 건너 서울로 가는 큰 길목이었다. 마을을 지나 강을 건너면 퇴강나루를 거쳐 문경새재를 넘어 서울로 연결됐다. 바로 영남대로의 주요 길목이었던 셈이다. 예천 새멸나루와 상주 퇴강나루는 이처럼 옛날 한양에 과거 보러가는 선비를 비롯해 양 지역 농산물, 부산 소금 등이 교류하던 주요 나루터였다.

20세기 중반까지 새멸 낙동강변에는 땅콩과 잠업이 번창했다. 부산 소금배가 올라왔고, 영남대로와 나루터가 만나는 이곳에 큰 장이 들어선 것이다. 새멸의 행정구역인 풍양면 낙상1리의 '낙상'이란 지명도 1932년 '낙동강'과 '상업'이 만나 생긴 명칭이다. '낙동강에 인접한 시장'에서 이름을 따온 것. 소금배와 서울로 향하는 나그네들이 몰리면서 나루터와 함께 주막도 한동안 번성했다.

김영태(58) 씨는 "삼강주막은 주막도 아이래. 삼강보다 장터가 유명했던 새멸주막이 있던 우리 마을을 더 쳐줬다고"라고 말했다.

소금과 땅콩, 양잠이 풍성했던 새멸 장터는 1934년 뒤 엄청난 물난리를 겪은 뒤 인근 면소재지가 있는 낙상2리 '풍양장'으로 옮겨갔다. 새멸의 나이 든 사람들은 그해 닥친 '갑술년 물난리'를 기억하고 있다. 당시 낙동강이 범람해 시장은 물론 마을 중턱까지 싹 쓸어버렸기 때문이다.

최진도(76) 씨는 "내가 태어나기 1년 전, 큰물이 나 한 집만 남고 다 헐었다고 어른들이 말씀하셨어. 현재의 풍양장은 강변에서 물이 넘치는 것을 피해 네 번째로 옮긴 곳"이라고 말했다.

◆강의 옛 풍경

새멸 사람들은 강과 더불어 살아왔다. 낙동강을 식수로 길어다 마시던 시절도 있었다. 물고기를 잡고, 수영을 하고, 배를 타고 인근 섬에 가서 놀기도 했다. 여름날 강변은 쾌적한 잠자리가 됐고, 모래사장이 좋았던 무렵에는 강수욕장이 한때 개장하기도 했다.

안삼영(44) 씨는 "강가에는 물새가 많았는데, 물새알도 주워 먹고 발을 쪼는 피라미도 잡아서 먹었다"며 "재첩도 많이 잡아 끓여먹었다"고 말했다. 또 "중학교 시절 모래사장이 좋아서 '강수욕장'을 개장했는데, 딱 3일 하고 말았다"며 "객지에서 온 사람이 술 마시고 강수욕을 했는데, 물살이 세 두 명인가 세 명이 죽는 바람에 그만뒀다"고 했다.

뱃놀이와 강변 놀이의 추억은 여성들에게 더 애틋하다.

정태순(80) 씨는 "내가 어릴 때는 배 타고 노는 것이 놀이의 전부였어"라며 "배 위에서 장구 치고, 춤추고 놀 때가 정말 즐거웠지"라고 회상했다.

김홍선(78) 씨는 '희초'의 아련한 기억을 떠올렸다.

"봄이면 강변이나 강섬에 여자들끼리 놀러가는 '희초'를 즐겼지. 동네 새댁들 다 나갔지 뭐. 시집살이하고 그러니까 하루만 좋다고 나가는 거지. 전부 한복을 입고. 장구 치고 북 치는 사람도 있었어. 퇴강의 강섬에는 미루나무가 가득 있었지. 시부모 모시고 애 키우느라 고생하다 하루 놀러 가면 얼마나 좋은지 몰라."

일 년 내내 농사일, 시부모와 남편 모시는 일, 자식 키우는 일에 시달리고 지친 동네 여성들끼리 모여 봄날 하루 놀러가는 풍습을 '희초'라고 했다. 이날만큼은 시어머니도 며느리의 일탈을 눈감아주는 전통이 있었단다.

나루터가 있었던 새멸 사람들은 대다수 배를 저어본 기억을 갖고 있다.

최진도 씨는 "점촌에서 학교 댕겼는데, 매주 들락거렸지. 노 젓는 것도, 나중엔 사공 없으면 내가 직접 저어 다니고"라고 말했다.

김영운(75) 씨도 "강가에 사는 사람들은 다 배를 몰 수 있어. 뱃사공들이 하루에 몇 번씩 몰고 다니면 팔도 아프거든. 그러면 '니 한번 저어봐라'고 하지. 나도 몰 수 있어"라고 했다. 겨울이면 뱃사공들이 물이 얼어 배를 몰지 못할까봐 밤새 얼음을 깨기도 했다고 한다.

소장수를 했던 박천만 씨는 "1970년대까지는 낙동강이 물이 많고, 겨울에는 단단하게 얼어붙어 소를 끌고 건너기도 했다. 그때는 소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미리 모래를 뿌려놓았지"라고 했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공동기획:매일신문·(사)인문사회연구소

◇마을조사팀

▷작가 안태호 ▷사진 이재갑 ▷지도일러스트 신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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