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물의도시 대구-동네우물 되살리기]2부)밖에서 길을 찾다-일본①

물 부족했던 '구마모토의 역설'

가토 기요마사가 판 구마모토성 천수각 앞마당의 우물을 대구 동네우물되살리기팀이 들여다보고 있다. 40m 깊이로 지금도 우물물이 마르지 않았다.
가토 기요마사가 판 구마모토성 천수각 앞마당의 우물을 대구 동네우물되살리기팀이 들여다보고 있다. 40m 깊이로 지금도 우물물이 마르지 않았다.
가토 기요마사가 만든 에즈호는 다량의 지하수가 용출된다. 시민들은 산책하다가 목이 마르면 이 용출수를 그냥 마신다.
가토 기요마사가 만든 에즈호는 다량의 지하수가 용출된다. 시민들은 산책하다가 목이 마르면 이 용출수를 그냥 마신다.
구마모토성 아래의 우물. 일본 관광객들이 우물을 구경하며 가토 기요마사를 칭송한다.
구마모토성 아래의 우물. 일본 관광객들이 우물을 구경하며 가토 기요마사를 칭송한다.

일본 남쪽 휴양도시 구마모토(熊本)는 활화산인 아소산(阿蘇山)과 온천, 골프장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우리나라와 가깝고 겨울에 따뜻해 사시사철 한국 관광객으로 붐빈다. 구마모토 공항의 입출국 심사대가 3개인데 그중 2개가 외국인 전용이다.

그만큼 한국인 관광객이 많다는 방증이다.

구마모토는 그러나 수려한 자연경관과 온천관광, 골프관광보다 지하수를 더 자랑한다. 일본 제1의 지하수 도시라는 것이다. '일본 제1'은 일본에서 지하수가 가장 풍부하다는 의미다. 구마모토 시민 73만 명은 100% 깨끗한 지하수로 만든 수돗물을 마신다.

구마모토에 지하수가 풍부한 이유를 2가지로 설명한다. 바로 아소산과 400여 년 전 에도(江戶) 시대 구마모토성을 쌓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서 연원을 찾는다. 구마모토시 수보전과 데라모토 계장의 설명은 이랬다.

◆불의 나라 물의 도시=아소산은 27만~9만여 년 전 네차례 대폭발을 했다. '불의 나라'다. 그 폭발은 아소산 중앙부에 세계 최대의 칼데라호를 만들고, 용암이 흘러넘쳐 구마모토 일대를 뒤덮었다. 1,592m 높이인 아소산이 만약 폭발하지 않았으면 외륜이라 불리는 분화구 둘레가 128㎞에 달하는 점으로 미뤄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산 보다 높았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용암은 식어 화산암 지층을 형성하고, 비바람에 풍화돼 검은 흙을 만들었다. 화산암은 구멍이 많아 지하수를 많이 품는다. 대지에 내린 비는 강으로 흘러가기 보다 지하로 재빨리 스며든다. 그래서 지하수가 풍부하다. '물의 도시'다. 제주도나 하와이 등 화산이 폭발해 지층과 토양이 만들어진 곳은 구마모토와 대개 비슷하다.

◆최초의 근대식 우물 개발자=가토 기요마사는 16세기 조선을 침략해 경상도를 거쳐 함경도까지 유린한 왜장이다. 그는 1597년 울산에 왜성을 쌓았다. 그해 12월과 이듬해 두차례에 걸쳐 조선군과 명군의 총공격을 받자 가토는 울산왜성에서 길게는 100여 일 농성(籠城)했다. 농성의 고통은 물과 식량의 부족이었다. 가토군은 소변을 받아마시고, 말을 잡아 먹으며 버텼다.

가까스로 살아 돌아간 가토는 일본을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로부터 구마모토 일대를 영지로 받았다. 물에 대한 아픈 추억을 가진 그는 구마모토성을 축조하며 120여 개의 우물을 팠다. 지금 남아 있는 우물은 모두 17개. 그 가운데에는 깊이가 36m, 40m인 우물도 있고, 특히 천수각 앞 마당의 우물은 지금도 마르지 않았다. 지금의 기술로는 100m, 200m 이상도 팔 수 있지만 그 당시 40m 깊이의 우물을 개발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놀란다. 가토를 일본 최초의 근대식 우물 개발자로 불러도 무방하다.

나고야성까지 만들어 축성술의 귀재로 불린 가토는 치수(治水)에서도 역량을 보였다. 시라카와강의 물을 끌어다가 밭을 무논으로 만들었다. 무논에서는 주로 벼농사를 짓지만 지하수를 만드는 역할까지 했다. 그냥 흘러가는 시라카와 강물을 재활용한 셈이다.

가토는 또 구마모토 시민들이 자랑스러워 하는 에즈호(江津湖)를 만들었다. 지하수가 용출되는 사실을 알고 266㎢(약 8천만 평)의 땅을 깊이 파 호수로 만든 것. 대구 동네우물되살리기팀이 찾은 그날 보트놀이와 산책하는 사람, 탐조가들이 에즈호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있었다. 호숫가에 용출수로 만들어 둔 우물의 물을 시민들은 스스럼없이 떠 마셨다. 데라모토 계장은 "아소산 폭발이 자연의 은혜라면 가토 기요마사의 치수는 인공의 은혜"라며 "그 덕분에 구마모토가 오늘날 일본 제1의 지하수 도시가 됐다"고 했다.

◆구마모토의 역설(逆說)=한국지질자원연구원 성익환 박사, 계명대 동산병원 김흥식 소아과 교수, 권대용 전 대구시상수도사업본부장 등 대구 동네우물되살리기팀이 구마모토 현지에서 토론했다. 인간의 역사에 우연이 있을까? 가토가 우물을 개발하고, 호수를 파고, 시라카와 강물로 무논을 만든 것은 필요에 의해서였다. 1천600년 영지로 받은 구마모토는 거친 땅. 화산암 지대라 비가 내리면 몽땅 지하로 스며들었다. 논농사가 어려웠다. 변변한 강이나 호수도 적었다. 시라카와강이라고 해봐야 우리나라 개념으론 샛강 정도 크기. 아소산의 압력으로 여기저기서 용출수가 솟아나오는 것이 하나의 희망이었다. 그래서 그는 영지의 주민들을 독려해 대역사를 펼쳤다. 물이 있어야 먹고 살고,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할 수 있었다.

구마모토가 지하수 천국이란 사실을 알게된 것은 오래지 않은 과거. 20m, 50m 우물을 개발하는 기술이 발전하고 난 이후의 일이다. 물이 없어 치수가 발전한 구마모토를 우리는 '구마모토의 역설'로 부르기로 했다.

일본에 지표수가 부족한 것은 비단 구마모토뿐만이 아니다. 화산지대여서 강의 유로(流路)가 짧고 기울기가 급하다. 비가 내리면 대부분 지하로 스며들어 버리고, 강으로 흘러도 금세 바다로 흘러간다. 퇴적 작용이 활발해 하상이 주변 지역보다 높은 천정천(天井川)이 많다.

◆슬픈 우리나라 수도 역사=일본은 물이 부족했으므로 치수가 발전했다. 일본 수도 사업은 에도 시대 가토 기요마사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400년 역사다. 우리나라 수도 역사가 100년이란 점과 비교하면 무척 빨랐다.

우리나라는 땅을 파면 물이 나오고 큰 강과 호수가 많아 홍수와 가뭄 다루기가 치수의 모든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가 국권을 강탈한 이후 일본 관료가 우리나라 행정을 좌지우지하면서 그들의 수도 정책을 그대로 우리나라에 적용했다. 일제 관리들이 주된 수돗물의 재료를 지하수 대신 지표수로만 바꿨다. 그게 우리나라 상수도 역사 100년을 만들었다. 오염된 강물과 호수물을 정수해 수돗물로 만들어 마시게 한 '왜곡의 역사'다. 대구 동네우물되살리기팀이 토론 끝에 내린 결론은 '슬픈 상수도 역사 100년' 이다.

글·사진 최재왕기자 jwcho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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