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옛날 이야기

이제 9살인 아들 녀석. 어릴 때 나를 죽으라고 좋아하더니 요즘 들어 그 정도가 점점 덜해진다. 왜 그럴까? 간혹 "아빠는 늙어서…"라며 뒷말을 흐리는 것을 보면 친구들과 비교하나보다. 그럴 때는 괘씸한 생각이 들다가도 이내 미안한 마음으로 바뀐다. 그리고 내심 염려도 된다. 이러다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은 아닌지.

그런 염려를 덜어주는 버릇이 녀석에게 하나 있다. 나의 옛날 이야기를 들어야 잠이 드는 것이다. 잠자리에 누워 옛날 이야기를 하노라면 같이 누운 아내와 작은 녀석은 몸을 뒤척이다가 이내 짜증을 낸다. 잠 좀 자자고.

어쩔 수 없이 큰 녀석을 데리고 다른 방으로 가 눕는다. "옛날 옛날에 흥부 놀부가 살았는데…." 세상이 다 아는 이야기이고 그리 재미난 내용도 아니고, 녀석이 모르는 내용도 아니다. 거기다 나의 한심한 이야기 실력까지 가미됐으니 재미가 없을 텐데…. 그래도 나의 옛날 이야기를 좋아하는 녀석이 고맙기만 하다.

이야기 소리가 졸음으로 잦아들면 녀석은 감은 눈을 뜨고 질책한다. 투정도 부린다. 제대로 하라고. 한참 후 자는가 싶어 '흥부가 형이냐 놀부가 형이냐?' 물으면 잠에 방해되니 문제는 내지 말란다. 그러다 녀석은 어느새 잠들고 나는 혼자서 창작한 옛날 이야기를 중얼거린다. 녀석이 잠든 것도 모른 채 말이다.

공부를 봐준다며 꾸중하면서 늦도록 책상 앞에 녀석을 잡아두는 때가 있다. 그런 날은 마음이 상해서인지 겁이 나서인지 옛날 이야기를 해 달라고 하지 않는다. 겁이 나서일까? 일을 마치고 옆에 누울라치면 자는 줄 알았던 녀석이 작은 소리로 묻는다. "아빠 오늘은 옛날 이야기 안 해 줄거지?"

혹시나 옛날 이야기를 해주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표정이다. 속이 상하고 혼이 나면서도 나의 옛날 이야기를 들어야 잠이 오는 녀석. 그럴 때 내 마음은 행복하기보다 오히려 안쓰럽다.

녀석이 태내에 있을 때 수시로 전래 동화책을 읽어주고 노래도 불러주곤 하였는데 그 소리에 익숙해졌나보다. 노래를 불러달라고 하지 않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새로운 이야기를 찾으러 자주 서점에 들러야 하고 잠이 쏟아져도 참아야 하는 고달픔은 있지만 요즘은 녀석이 불러주기를 은근히 기다린다. 언제까지 나를 불러줄는지, 그 마지막 날이 영 오지 않으면 좋겠다. 오늘도 나는 행복한 마음으로 옛날 이야기를 한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옛날 옛날에 흥부와 놀부가 살았는데….

임주현<변호사>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