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산 이만도 선생의 자정순국 이후 숱한 안동인들이 잃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내 나라를 떠나 만주 등 해외 망명길에 나섰다. 1911년 안동의 대표적 명문대가였던 임하면 천전리 의성김씨 백하 김대락(1845~1914)과 법흥동 고성이씨 석주 이상룡(1858~1932) 선생이 그 대열의 선두에 있었다. 백하의 내앞마을 문중을 시작으로 안동과 주변 지역에서 만주로 독립투쟁하러 간 사람은 100여 가구 약 1천여 명에 이른다. '만주벌 호랑이'로 불린 일송 김동삼(1878~1937)도 그 중 한사람이었다. 이들은 재산도, 신분도 모두 버렸다. 나라찾는 일에 모든 것을 걸었다. 영하 30℃를 밑도는 엄동설한과 일제의 감시를 견디면서 열차로, 걸으며 떠났던 망명길은 그 자체가 고난 길이었다. 이들은 통화시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 합니하, 쏘배차 등지에 터를 잡고 경학사와 신흥강습소, 신흥무관학교, 백서농장 등 항일 독립투쟁을 위한 근거지를 마련했으며 항일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 왔다. 이들의 피와 땀은 만주 독립운동사의 뿌리가 됐다.
◆폭염속 항일독립투쟁 흔적 찾아 5천여㎞ 만주탐방
지난 여름, 연일 35℃를 오르 내리는 폭염속에서 독립운동유공자 후손 6명과 안동독립운동기념관 봉사단체인 '나라사랑봉사단' 단원 13명 등 20여 명은 안동인들의 항일 독립투쟁 흔적을 더듬는 '5천여㎞ 만주탐방'에 나섰다.
이들은 6일 동안 통화시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촌·합니하 신흥무관학교·백서농장 등 서간도 독립유적지, 청산리전투 기념비, 일송정과 해란강, 용정시의 윤동주 생가와 용정중, 길림시의 대동공장 터와 길림감옥, 서란시의 석주 이상룡 선생의 순국지인 소과전자촌과 선생의 묘터 등을 둘러봤다. 안동인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와 한국 독립운동사의 흔적을 더듬은 것. 이들은 매일 12시간의 강행군을 통해 5천여㎞ 이상의 거리를 버스와 발로 더듬었다. 머나먼 이국땅에서의 설움과 울분을 삼키며 오로지 나라를 되찾기 위해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었던 독립운동가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오롯이 가슴에 새기고 돌아왔다.
이번 탐방지역은 경술년 국치 이후 향산 이만도 선생의 자정순국 뜻을 이어 받은 안동지역 유림들이 자신들의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항일독립운동을 위해 떨쳐 일어서면서 근거지로 택했던 지역들이다. 만주지역에 처음으로 정착했던 안동인 김대락 선생이 살았던 삼원포와 일송 김동삼의 백서농장, 이후 만주에 도착했던 석주 이상룡 선생의 흔적이 남아있는 소과전자촌 등 안동사람들의 나라사랑이 고스란히 전해오는 지역이다.
백하 김대락 선생의 후손 김시중(74) 안동독립운동기념관 감사는 "안동인들의 만주독립운동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었던 소중한 기회였다"며 "독립운동가들의 흔적 등 유적지에 대한 보존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만주 독립운동사 뿌리 '백하 김대락'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백하는 앞장서 서간도 망명을 결단했다. 그 해 12월 24일(음력), 66세의 늙은 몸을 이끌고 문중의 청·장년을 비롯한 만삭인 손부와 손녀(평해 사동으로 출가)를 대동했다. 국내를 통틀어 첫 번째의 문중 단위 집단 망명이었다. 안동에서 추풍령까지 1주일을 걸었다. 기차를 타고 서울을 거쳐 신의주까지 간 다음 다시 걸어서 압록강 너머 최종 목적지인 유하현 삼원포(三源浦) 이도구(二道溝)에 닿은 것이 1911년 4월 18일이었다. 여정 중간 항도촌에 머무르는 동안 손부와 손녀가 아이를 낳았다. 증손과 손자가 '적의 땅'에서 태어나지 않음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내앞마을의 의성김씨 망명객은 김동삼, 백하의 아들로 해방 직후 김구와 김일성이 만난 남북연석회의 임시의장을 맡았던 김형식(1877~1950)도 함께 했다.
삼원포 이도구에 정착한 그는 1911년 5월 설립된 '신흥학교' 교장에 추대됐으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사양했다. 1911년 '경학사'(耕學社)와 1913년 '공리회'(共理會) 결성에 참여했고 '공리회취지서'(共理會趣旨書)를 작성했다. 김대락은 만주망명 후 줄곧 이주 한인들의 안정된 정착을 위해 노력하다 1914년 12월 10일 삼원포 남산(藍山)에서 작고했다.
백하의 묘는 찾을 길이 없다. 일제가 훼손할까 봐 비석을 세우지 않았다가 위치를 알 수 없게 됐다. 2002년 안동의 의성김씨 선산에 가묘를 쓰면서 역사학자 조동걸이 비문을 지었다.
'백하는 유학자, 선비, 계몽주의 민족운동가, 독립군 기지를 개척한 독립운동 선구자다. 학자가 의리를 찾는다면 여기 와서 물어보라. 위정자가 구국의 길을 묻는다면 여기 와서 배우라. 저승으로 가는 늙은이가 인생을 아름답게 마감하는 지혜를 구한다면 여기 와서 묻고 배우라고 하자.'
◆안동인 정착 서간도 '해외 항일운동 중심지'
백하와 석주 등 안동인들이 1911년대 정착했던 중국 만주 서간도 지역은 한인사회 자치기구인 '경학사', '신흥무관학교'와 그 모태가 된 '신흥강습소', 독립군들의 특별군영이었던 '백서농장', 대한독립단 광복군 총영, 교육시설 등 해외 망명 항일독립운동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백하 선생 정착지와 맞닿은 삼원포 추가가. 이 마을 대고산 중턱에서 경학사 결사 논의가 이뤄졌다. 서간도로 이주한 한인사회의 자치기구 설립을 위한 논의였다. 1911년 6월 이상룡 선생이 경학사 사장으로 추대돼 한인사회를 주도했다. 이 마을에서 안동인들은 신흥무관학교의 모태인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
유하현에 정착했던 한인 지도자들은 1912년 통화현 합니하로 이주했다. 김대락도 이 무렵 이주했다. 이 곳에서 '신흥(무관)학교'가 문을 열었다. 일정한 군사훈련과 중등교육과정을 가르칠 수 있는 교육기관을 처음으로 갖춘 것.
1919년 3·1운동 등 국내 항일투쟁이 활기차게 진행되면서 해외 항일투쟁도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1919년 4월 한족회가 조직되고 신흥무관학교 확충이 추진됐다. 합니하의 신흥학교는 외진 곳으로 몰려드는 청년들을 품기에 부족했다. 이 때문에 한국인이 많이 사는 삼원포 고산자 부근에 본부를 이전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을 중심으로 한 신흥학우단은 제2군영을 만들어 정예부대를 양성하기 위한 특별훈련대를 편성했다. 이 특별군영이 백서농장이었다. 김동삼 선생이 농장주로 활동했다. 1915년부터 1919년까지 385명이 입영해 훈련했다. 백서농장에서의 고난은 이후 항일 유격전에 큰 교훈이 됐다.
중국 연변박물관 근현대문물부 부연구관원인 허영길 교수는 "삼원포 등 서간도 지역은 안동에서 망명해 온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중심지였다"며 "지금은 대부분 흔적이 없어져 정부차원의 만주 독립유적지 보존이 절실하다"고 했다.
안동·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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