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칼럼] 꼬시래기 문화

오래전부터 한 편의 뮤지컬이 올가을 공연문화의 도시 대구를 뜨겁게 달굴 거라고 홍보를 시작했다. '최고' '최초' '최대'의 수식어를 달면서 A방송은 연일 보도와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렇지만 경쟁사는 때를 놓치지 않고 특별한 작품은 없었지만 몇 년 동안 대박을 쳤던 작품을 다시 가져와 맞불을 놓는다. C방송은 지난번에 이어 대구의 흥행 신화를 다시 쓴다고 기염을 토하고 있다.

이런 '아사리판'에는 언제나 눈치나 보면서 빈말을 날리며 곡예하듯 오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모두 지역 문화에 책임을 져야 하고 영향력을 지닌 사람들이다. 그이들은 뮤지컬에 온 게 아니라, 언론사의 신년교례회에 온 듯한 착각에 빠진다.

A방송은 언제나 B사, C방송은 언제나 D사와 함께 대형 무대를 마련한다. '이번 공연 TV에서 엄청나게 홍보하더라' 하면 그 사람은 A방송만 보는 사람이다. '이번 공연은 별론 것 같은데 저녁 종합뉴스에 거의 특집으로 나오더라' 하면, 그이는 C방송만 보는 사람이다. 이 양대 방송 외에, 양대 신문이라고 자처하는 매체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또, 방송과 신문은 서로 하나씩 결합하여 맞선다. 일종의 이매체 연합군이다.

물론 이들은 흥행만을 전제로 하다 보니 지역민의 예술 취향이나 변모된 정서는 아랑곳없고 재탕 삼탕도 서슴지 않는다. 게다가 좌우에서 풍각쟁이들처럼 불어대고 흔들어대니 문화 소비자는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언론사가 앞장서서 감언이설 질러대는 문화의 맞불에 타죽을 판이다. '소리 없는 문화 전쟁' '경쟁력을 높이는 문화 현상'이라고 이 사태를 미화하는 사람도 만났었다. 자신이 죽지만 않는다면 세상에서 전쟁만큼 재미있는 구경이 어디 있겠는가.

양심 있고 장래를 내다보는 유명 쇼핑몰은 동일업종에 중복 분양을 하지 않는 법이다. 또한 마구잡이 재고 정리 세일은 하지 않는다. 입주자를 보호하는 기업정신이다. 이것이 괜찮은 사회의 불문율이 아닐까. 경쟁이 발전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중간상인들에게 놀아나는 문화판, 특히 한판에 눈이 먼 공연 흥행의 횡포를 생각한다면 더 현명해질 필요가 있다. 제대로 골라 먹는 재미를 느끼면서 도리어 '업자'를 길들여야 할 책임이 문화 소비자들에게 있다.

흥행을 전제로 하는 공연 기획자들은 문화 소비자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하는 눈치는 아니다. '소비자들쯤이야' 하면서, '주는 대로 잘 받아먹는 소비자'를 길들여야 한다는 심산이다. 특히 공연 문화가 활성화되지 않은 지방에서야 찬 음식 더운 음식 가릴 처지가 아닌 것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아무리 경쟁이 문화판을 키운다고는 하지만 지역의 문화 공연은 최소한 진흙판의 개싸움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문화시장은 대중독재(Mass Dictatorship)의 지배 형태를 띤다. 대중독재란, 오랫동안 독재의 일방적인 희생자로 그려졌던 20세기 전체주의 국가들의 국민이 사실은 체제의 공범이었다는 이론이다. 대중을 끌어들여 독재를 하려는 것, 아니었던가. 대중매체가 대중독재, 문화독재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는 현실이 서글프다. 나쁜 소수도 문제지만 방관과 침묵이라는 암묵적 지지를 보내는 다수가 문제다. '알아서 긴다'는 이야기다.

'꼬시래기 제 살 뜯기'라는 말이 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문어가 제 다리 먹어치우듯' 일종의 문화의 자식현상(自食現象)이 나타나고 있다. 누구는 '먹고살기 어려우니… ' 하면서 눈감아주고, 누구는 '살아남은 자를 택하겠다'고 호언한다. 그렇지만,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에 선 자들을 위해 예약되어 있다'고 한 존 F. 케네디의 연설문 속의 이 '경고'를 두려워하면서, 평균점수가 높은 문화시대를 열어가는 문화 소비자들의 '힘'을 느끼고 싶다. 평소 하고 싶었던 이야기였지만, 개운하지만은 않은 까닭은 나도 모를 일이다.

김정학(천마아트센터 총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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