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김소정(20·여) 씨는 틈틈이 가방에서 A4 용지 크기의 전자책을 꺼내든다. 전자책에 읽고 싶은 책을 수십 권 넣어 다니며 읽는다. 김 씨는 "종이책은 많아야 2, 3권 넣어 다닐 수 있지만 전자책은 거의 무한정으로 넣을 수 있다"고 했다. 독서를 좋아하는 그녀는 올해 초에 부모님께 전자책을 선물받았다. 김 씨는 "지하철 등에서 이걸 꺼내보면 사람들이 신기한 듯 쳐다본다"며 "그 같은 시선을 즐기기도 한다"고 했다.
종이가 아닌 조그마한 스크린을 통해 책을 읽는 시대다. 전자책은 휴대성과 간편성 등을 무기로 종이책을 대체하는 매체로 떠오르고 있다. 일부에서는 종이책이 곧 종말을 고할 것이라는 예측까지 내놓고 있다. 과연 전자책은 수백 년 넘게 이어진 '종이책 천하'(天下)를 깨고 주류 매체로 등극할 수 있을까.
◆전자책의 화려한 등장
전자책은 10여 년 전부터 '주목할 만한 IT기기'로 꼽혔지만 시장의 반응은 좀처럼 달아오르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만년 기대작'이라며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2007년 11월 '킨들'이 나오면서 전자책은 드디어 이름값을 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세계적인 인터넷서점 아마존의 야심작인 킨들은 풍부한 콘텐츠와 온라인 다운로드를 앞세워 출판 시장에 혁명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무선인터넷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콘텐츠를 이용할 수 있게 한 전략으로 소비자를 유혹했다. 또 신간은 비싸게, 고전은 싸게 판매하고 콘텐츠 다운로드에 드는 비용을 무료로 제공한 것도 효과적이었다. 킨들은 출시 2년 만에 200만 대 이상 팔리면서 인기 작가들도 전자출판 대열에 합류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국내에서도 킨들의 성공에 힘입어 지난해부터 전자책이 줄지어 나오고 있다. 현재 국내 시장에 출시된 제품은 대략 5, 6종. 대표적인 제품은 아이리버의 '커버스토리', 삼성전자의 'SNE-60', 인터파크의 '비스킷' 등이다. 여기에 중소기업 제품들이 가세한 상황이다.
노트북보다 작은 5, 6인치 정도의 스크린을 가진 e북은 뭐니 뭐니 해도 언제 어디서든 자신이 원하는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강점을 갖고 있다. 수많은 서적 콘텐츠를 e북에 넣고 다니면서 필요할 때마다 열어볼 수 있는 것이다. 교보문고 대구점 고객지원팀 전길채 대리는 "전자책은 1천 권 이상의 책을 기기에 저장, 휴대할 수 있다. 또 무선 인터넷을 지원하기 때문에 콘텐츠 다운로드나 신문 보기 등도 손쉽다"고 말했다. 더욱이 전자사전이나 메모, MP3, 읽어주기 등의 다양한 부가 기능도 포함돼 있다. 또 다른 특징은 e-잉크를 사용함으써 눈부심을 최대한 억제했다는 점이다. 아이리버 홍보팀 관계자는 "최대한 종이책에 가까운 편안함을 주기 위해 특수 잉크와 디스플레이를 사용했다"며 "이로 인해 화면이 컬러가 아닌 흑백"이라고 했다.
◆1차전은 종이책 완승
종이책의 위기를 몰고 올 것으로 여겨진 전자책이 국내에 나온 지 1년이 넘었지만 시장 반응은 지금까지 냉랭하다. 업계에서는 지난해부터 현재까지 판매된 총량이 10만 대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같이 판매가 부진하자 최근 삼성전자는 e-잉크를 기반으로 한 전자책 생산을 중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의 전자책 시장은 미국의 전자책 열풍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지역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전자책을 판매하는 오프라인 매장을 찾기가 어려운데다 막상 전시를 해놓아도 판매량은 지지부진하다. 7개월 전부터 전자책 코너를 마련한 교보문고 대구점에는 한 달에 2, 3대 정도 나가는 수준이다. 전 대리는 "선물용이나 책을 많이 읽는 VIP고객 위주로 간혹 판매되고 있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콘텐츠 부족을 전자책 부진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는다. 현재 국내 최대 서점인 교보문고가 6만5천 권을 보유하고 있는 등 양적으로만 보면 적잖은 인프라가 갖춰져 있지만 문제는 베스트셀러나 신간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인기 있는 책의 경우 전자책 콘텐츠로 보는 것이 쉽잖다. 아이리버 측은 "아직 국내 출판사들의 전자책에 대한 인식이 받쳐주지 못하고 있다. 저작권이나 이권 문제 등으로 전자책 콘텐츠 개발에 소극적이다"고 했다.
종이책에 대한 소비자들의 강한 충성도도 전자책 부진의 원인이다. 사람들이 종이책에 대한 아날로그적 감성에 너무나 익숙해 있다는 것. 대학생 박진아(22·여) 씨는 "종이책은 한 장 한 장 넘기는 맛이 있고 책 특유의 향기도 있다. 반면 예전에 전시된 전자책을 한 번 만져봤는데 어색하고 이질적인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소장 가치도 종이책만의 특징이다. 직장인 정창민(41) 씨는 "거실 책장에 책이 빼곡히 꽂혀 있는 것을 보면 가슴이 뿌듯할 때가 많다"며 "전자책은 결코 이런 기분을 대신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치열한 2차전 예고
하지만 종이책과 전자책의 싸움을 속단하기는 이르다. 전자책이 대대적인 반격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 전자책 업계에서도 향후 충분한 경쟁력을 가질 것으로 자신하고 있다.
전자책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것은 태블릿PC다. 애플의 아이패드로 촉발된 태블릿PC 열풍은 기존 e잉크를 기반으로 하는 전자책을 위협하며 새로운 전자책의 강자로 떠오르고 있다. 태블릿PC는 기존 전자책의 단점들을 상당히 보완했다. 화려한 컬러에다 독서 기능 외에 인터넷, 동영상 등 다양한 기능이 장점이다. 더욱이 책장을 넘기듯이 화면을 터치하거나 책장 소리가 나는 방식 등도 경쟁력으로 꼽히고 있다.
e-잉크를 기반으로 하는 전자책들도 가격을 낮추고 좀 더 다양한 기능을 탑재하는 등 적극적인 마케팅을 전개하고 있다. 올 초만 해도 30만원대였던 전자책들이 대부분 20만원대로 가격이 내렸고 최근에는 10만원대까지 출시됐다. 아이리버 관계자는 "태블릿PC 출현으로 전자책 시장 규모가 커지겠지만 기존 전자책 시장도 일부 잠식할 것으로 보고 차별화를 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종이책의 미래를 놓고 논란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세계적인 미래학자 니콜라스 네그로폰테 MIT(매사추세츠공대) 미디어랩 교수는 최근 한 콘퍼런스에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종이책은 5년 내에 사라질 것"이라며 "아이패드와 e북 단말기에 기반을 둔 전자책이 종이책 시장을 잠식해 주류 매체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종이책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종이책이 주는 아날로그적 감성과 심리적인 안정감 등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 계명대 문헌정보학과 박일종 교수는 "전자책이 주류가 되려면 사람들 손에 익숙해지고 전자책을 통한 지식 습득이 종이책보다 훨씬 수월하다는 것을 느껴야 한다"며 "지금 태어나는 세대가 성장한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경북대 문헌정보학과 김희섭 교수도 "과거 인터넷이 생길 때도 도서관이 없어진다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신기술에 대한 소비자의 호기심으로 잠시 전자책이 유행을 탈 수도 있겠지만 안정기에 접어들면 종이책과 전자책이 서로 보완하면서 발전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창훈기자 apolonj@msnet.co.kr
사진·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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