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금배지'만 달면 생기는 병은?…제 밥그릇 챙기기

앙숙처럼 싸워도…국회의원 종신연금법 본회의서 하루만에 통과

국회의원과 지방의원의 제 밥그릇 챙기기는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 고질병이다. 이 고질병에는 정당과 이념도 없다. 죽기 살기로 싸우다가도 이 고질병 앞에는 침묵의 카르텔이 작용한다. 명분도 체면도 없고, 국민적 공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화두가 되고 있는 '공정한 사회'에도 역행한다. 최근 정치권은 잇따라 제 밥그릇 챙기기 행태를 보여 비판을 받고 있다.

◆국회의원, 밥그릇 챙기는 데는 정당·이념도 없다=여야가 전직 국회의원에게 평생 매월 120만원씩을 지급하도록 한 내용의 '헌정회 육성법 개정안'을 2월 국회에 통과시킨 게 대표적인 제 밥그릇 챙기기 사례다. 이 개정안은 대상자의 재산 규모나 다른 연금의 수급 여부와 상관없이 영구적으로 지급받도록 돼 있다. 이를 두고 "전직 의원에 대한 종신 은사금 아니냐"는 비판이 강하게 일었다.

특히 이 개정안 통과 과정을 보면 기가 찰 정도다. 2월 국회 운영위와 법사위를 거쳐 본회의를 하루 만에 통과시켰다. 세부적인 절차나 지급 기준에 대한 찬반 토론도 없이 일사천리로 통과된 것. 17대 국회에서 헌정회 지원금 폐지를 추진하겠다던 민주노동당 의원들조차 전원이 찬성표를 던졌다. 이를 두고 "평소에는 그렇게 싸우더니 밥그릇이 걸리니까 보수고, 진보고 없다"는 등 비판이 적지 않았다.

특히 개정안이 워낙 전격적으로 처리된 탓에 언론이나 시민사회단체에서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8월 민주당 천정배 의원이 트위터를 통해 비판을 하면서 뒤늦게 사회적 공분을 샀다. 이에 대해 비난 여론이 급등하자 야당을 중심으로 "개정안을 검토해야 한다"며 한발 물러섰다. 이념과 정당을 떠나 집단 이익을 챙기는 데 정치권의 침묵의 카르텔이 작용한 사례다.

이런 와중에 박희태 국회의장은 이달 초 "13년간 동결된 국회의원 세비(歲費)를 올려야 한다"고 주장해 비판을 자초했다. 박 의장은 미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기자들과 만나 "IMF 외환위기 당시 의원들의 세비를 깎은 뒤 그동안 한 번도 세비 인상이 이뤄지지 않았고 이후 누구도 이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다"며 "세비를 원상회복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것.

이 같은 발언이 알려지자 누리꾼들은 "평생 연금 120만원을 받는 것도 모자라 세비까지 올리려고 하느냐" "국회의원들이 자기 배만 채우려고 하는 것이 과연 공정한 사회인가" 등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더욱이 13년간 세비가 동결됐다는 박 의장의 발언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현재 국회의원의 세비(각종 사무실 유지비 제외)는 1억1천300여만원 수준이다. 1998년 IMF 당시 6천820만원이었다가 2004년 1억90만원, 2007년 1억670만원, 2008년 1억1천300만원으로 꾸준히 올랐다. 2009년과 2010년에만 동결됐다.

비판 여론이 일자 같은 당인 한나라당 소속 의원들조차 공개적으로 '반대'를 하면서 박 의장만 '머쓱'하게 됐다.

최근 국회를 통과한 지방행정체제 개편 특별법안도 정치권의 무소불위적 제 밥그릇 챙기기의 실태를 여실히 보여줬다.

여야는 4월 행정의 효율성과 정치개혁 차원에서 서울시와 6개 광역시 구의회를 2014년부터 폐지하는 내용의 지방행정체제 개편안에 합의했다. 하지만 정치권은 특별한 이유 없이 법안 처리를 미뤄오다 9월 구의회 폐지안을 삭제한 채 본회의에서 특별법안을 통과시켰다.

앞서 여야는 지난해 현재의 3, 4단계인 지방행정체제를 단순·효율화하겠다는 목표 아래 특위를 구성하고 시·도 및 구·군 의회 폐지 방안 등에 대해 논의했다. 시·도 의회 폐지안은 일부 의원의 거센 반발로 논의 과정에서 백지화됐고, 구 의회 폐지안만 논란 끝에 특위를 통과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의원들의 기득권 챙기기의 제물이 되면서 없었던 일이 됐다.

이처럼 여론의 역풍이 우려되는 데도 기존의 특위 합의까지 뒤집은 것은 구 의회의 존치 여부가 해당 지역구 의원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특별시와 광역시의 구 의회가 없어지면 1천여 명의 구의원 자리가 없어지고, 구의원 공천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역구 국회의원의 '내 사람 챙기기'도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란 것. 이를 두고 "집권여당인 한나라당이나 제1 야당인 민주당이 모두 국민 기만에 손을 맞잡은 꼴"이라는 비판이 거세다.

◆지방의원의 밥그릇 챙기기=광역시·도의회는 4년마다 기초의원 선거구제 분할 문제를 두고 제 밥그릇을 챙기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고쳐지기는커녕 반복되고 있다. 특히 대구시의회와 광주시의회는 각각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텃밭인 탓에 더욱 비판을 받고 있다.

기초의원 선거구 확정은 지역 법조계·학계·언론계·시민사회단체 등의 대표가 참여한 '선거구 획정위원회'가 만든다. 선거구 획정위는 일부 큰 선거구에 한해 인구 비율과 다양한 정치 세력들의 의회 진출이라는 명분으로 '기초의원 4인 선거구제'로 결정해 왔다. 이 안은 해당 시·도의회 소관 상임위를 거쳐 본회의에서 통과된 후 최종 확정된다.

하지만 대구와 광주 등 특정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자기 당 후보가 동반 당선되기 쉬운 '2인 선거제'를 고집하면서 '4인 선거구제'는 본회의를 앞두고 뒤집혔다. 대구시의회는 2월 4인 선거구 12곳을 24개의 2인 선거구로 분할했다. 당시 대구시의원 29명 중 28명이 한나라당 소속이었다. 대구시의회는 앞서 2006년 5·31선거 직전에도 4인 선거구 11곳을 신설하는 선거구 획정 조례 개정안을 마련했으나, 본회의에서 기습적으로 모두 2인 선거구로 바꿔 통과시킨 전력이 있다.

광주시의회도 2월 기초의원 4인 선거구 6곳을 모두 2인 선거구로 바꿔 본회의를 통과시켰다. 당시 광주시의원 19명 모두가 4인 선거구제에 반대하는 민주당 소속이었다. 경남도의회도 마찬가지로 4인 선거구제를 2인 선거구제로 분할하는 데 동참했다.

시·도의회가 4인 선거구제를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같은 당 후보를 4명까지 낼 경우 유권자들의 견제 심리가 발동해 '싹쓸이'를 할 수 없고, 오히려 소수 정당 후보나 실력 있는 정치 신인이 당선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소수정당과 시민사회단체들은 이를 두고 "지방의원들의 제 밥그릇 챙기기이자 일당독재를 획책하려는 반개혁적인 정치 행태"라고 일제히 비난했지만 되돌릴 힘이 없었다.

6·2지방선거 결과만 두고 보면 4인 선거구제로 치러졌더라면 대구와 광주에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독점 구도가 더 많이 깨졌을 것이란 분석이 적지 않다.

이창환기자 lc15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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