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를 뜨겁게 달구던 여름도 지나고 아침저녁으로 와 닿는 바람이 서늘합니다. 하늘은 청명하고 들판은 노랗게 물이 들고 있습니다. 폭염에 맞불이라도 지피듯 무성했던 배롱나무도 어느새 사위어가고 나뭇잎마다 제법 붉은빛이 도는 가을입니다. 때 아니게 쏟아져 내린 비에 나라 안이 뒤숭숭하지만 한가위를 지나면서 달빛은 더 맑고 높아졌는데요. 바람이 마음속으로 부는 듯한 가을밤엔 편지를 하고 싶어집니다. 편지지를 펼쳐들면 거기 달빛이 가득 내려앉습니다. 손끝에 힘을 주어 또박또박 편지를 쓰고 싶습니다.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줄 것 같으니까요. 은행나무 노랗게 물드는 길을 천천히 걸어 닿은 우체국에선 우편번호를 찾느라고 잠시 뜸을 들일지도 모르겠어요. 부모님이나 친구, 연애 시절 말고는 편지라곤 부쳐보지 못한 아내나 남편이면 좋겠고 늘 잔소리꾼 역할만 했던 자식이라도 좋습니다. 편지를 쓰지도 받지도 않는 요즘이라면 누구라도 그대가 된 행운을 얻게 된 사람은 잠시 행복감에 젖지 않을까요. 추억에 잠기기도 하고 조금은 아련한 느낌으로 돌아가 어떤 생각에 젖기도 할 것입니다. 사는 일이 바빠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멀어지고 만 친구에게 용기를 내어 전화기를 들게 될지도, 가까운 우체국으로 달려가 엽서라도 한 장 보낼지도 모르겠네요.
한반도의 기후가 아열대성으로 바뀌고 있다고 합니다. 축복 같은 이 가을이란 계절도 점점 짧아져서 아예 없어질지도 모른답니다. 가을이 없어지면 그나마 남아있던 편지도 사라질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편지는 박물관에서만 찾아볼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가을 없이 맞는 겨울이 유난히 춥게 느껴지는 것처럼 편지가 사라진 삶도 어쩐지 허전하다고 느껴지는 건 저만 그럴까요?
한 편의 시 편지를 부치며 글을 마칩니다.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신다면 기쁘겠습니다.
어느 가을날에는 햇살을 깎아/ 막 돋는 아침의 눈동자에 편지를 씁니다/ 아침이 끌고 나온 들판의 널따란 등에/ 시시각각 푸른빛이 변하는/ 해 뜨는 쪽 하늘 한 자락 끌어와 쓰고/ 오후로 가는 나뭇가지에도 쓰고/ 가지에 걸린 낮달의 흰 얼굴에도 씁니다/ 쓰지 못했던 말들이 너무 많아/ 끝도 없이 써지는 말끝에 땀이 배입니다/ 잠깐 비가 오고 문득 밤입니다/ 햇살도 끝이 닳아/ 가물가물 깜박깜박 써집니다/ 당신께는 별을 부쳤다고 우길 생각입니다/ 하늘 가득 써놓은 별은/ 몇 번의 가을이 가고 어느 날 다시 오는 봄처럼/ 오래 읽혀지겠지요/ 안드로메다 너머 우체부 은하와 편지 은하의 사이처럼/ 우리가 멀어지고 있다고 해도/ 별과 별 사이는 본디 멀어지는 것/ 이제는 다 괜찮습니다. 원 태 경내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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