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다. 지하철을 탔다.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목적지까지 갈 길은 멀고 막막하기만 했다. 어느 역에 닿았을 때다. 서 있던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다 내리자 한결 조용해졌다. 그때까지 나는 문 옆 쇠기둥에 의지해 서 있었다. 왼손엔 무거운 짐을 들고 있었고 오른손은 핸드백을 들었다. 몸의 중심조차 가누기 어려웠다. 힘겹게 서 있건만 누구 하나 자리는 고사하고 짐이라도 들어주려는 사람이 없었다. 앉아있는 승객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남학생이 책을 읽고 있다. 그 옆의 젊은이는 아예 눈을 감고 있었다. 거의 포개 앉은 여학생 몇 명은 이야기에 취해 정신이 없다. 나는 지하철 안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시대가 변하긴 많이 변했다고. 급변하는 사회의 흐름 속에 세대 간의 생각과 가치기준이 이렇게 다른 것인가. 우리들의 젊은 날엔 지금보다는 좀 달랐다. 나이 든 사람이 버스에 오르면 무조건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 양보를 해드렸다. 그것은 생활의 기본이기도 했다. 마치 조건반사 같았다. 그런 생각을 행동에 옮길 수 있었던 것은 학교나 가정에서의 인성교육이 그만큼 철저했기 때문이었다.
하기야 요즈음 아이들은 그 나름대로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치열한 입시경쟁 속 생활이다. 다른 것은 생각할 여유가 없을 것이다. 학교나 가정에서 원하는 것은 우수한 성적이다. 인성이야 어찌 되었건 공부만 잘하면 된다는 것이 오늘의 사회 풍조다.
공부 잘하는 사람이 살아가기 편안한 직업을 가지는 경우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이렇듯 성적이 우선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생활예의가 바르게 이루어지겠는가.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서 있기가 점점 힘이 들었다. 한편으론 스스로 위로하고 있었다. 한 살이라도 젊어 보이려고 며칠 전 흰 머리카락을 염색했었는데 그것이 다른 사람 눈에 조금은 젊어 보이는 모양인가. 혼자 착각하고 있었다. 나이가 들면 생긴다는 검은 반점이 있는 팔목은 의식적으로 눈길을 보내지 않았다. 착각은 커트라인이 없고 자유라던가. 나는 한껏 젊음에의 향유를 누리며 피곤한 몸을 추스르고 있었다.
어느 역인가. 지하철이 서고 한 사람이 내렸다. 빈자리에 앉았다. 무심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때 한 할머니가 출발하려는 지하철을 힘겹게 오르고 있었다. 할머니는 경로석 쪽으로 가지 않았다. 조금 전 내가 서 있던 그 자리에 서는 것이 아닌가. 어림잡아 일흔이 훨씬 넘었을 것 같고 거동이 불편해 보이는 할머니였다.
나는 일어나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몰라 한동안 지켜보았다. 나보다 젊은 사람들이 모두 앉아 있는데 나이 든 내가, 그것도 짐까지 가진 내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 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다. 아무도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일어나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주위를 한 번 더 둘러보았다. 할머니 표정도 으레 그러려니 하는 듯했다. 서 있는 것에 단련되어 있음인가.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야말로 벌떡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었다. 아무도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것에 대한 노여움이었다. 나야 상관없다. 이 할머니에게조차 자리 양보 없는 오늘의 현실에 대한 분노였다.
"이 자리에 앉으세요. 할머니."
나는 지하철 안에 있는 승객이 모두 들리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미안해하는 할머니에게 젊은 사람들을 다 제쳐 두고 자리를 양보한 것이다. 그들에게 본보기가 되기 위함이었다. 하기야 독일의 어느 지역에는 노인에게 자리 양보는 안 된다고 한다. 자리를 양보하면 노인들이 무척 당황해한단다. 이유는 나이 든 사람에게 당신은 늙고 힘없는 노인네라고 조롱하는 행위라던가. 그러나 이곳은 독일이 아니고 우리나라다. 오늘 따라 나 자신이 자랑스럽기만 하다.
한편 생각하면 우울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오늘날 선진국 교육은 인성 교육부터 철저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우리도 새로운 교육이 필요할 것 같다. 허물어져 가는 도덕심을 바로 세우는 일이 절실한 때가 아닐까.
허정자(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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