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雲門에서 華岳까지](40)성현역과 이서국능선

고려때 역마 설치된 성현驛, 대구∼밀양 잇는 교통의 핵

비슬기맥서 남쪽으로 갈라져 내려서는 산줄기들. 용각산 및 유천지맥을 지난 후엔 이런 지릉들이 다양하게 발달하면서 청도의 읍·면과 마을들 권역을 가르는 분계선으로 역할한다. 가장 멀리 높게 보이는 건 비슬산 주능선 및 거기서 남쪽 비티재로 이어지는 산줄기다
비슬기맥서 남쪽으로 갈라져 내려서는 산줄기들. 용각산 및 유천지맥을 지난 후엔 이런 지릉들이 다양하게 발달하면서 청도의 읍·면과 마을들 권역을 가르는 분계선으로 역할한다. 가장 멀리 높게 보이는 건 비슬산 주능선 및 거기서 남쪽 비티재로 이어지는 산줄기다

용각산과 유천지맥 살피기에 들인 시간이 한 달이나 됐다. 그런데도 겉핥기밖에 안됐다는 아쉬움이 크다. 그 정도로 커버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거대 권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갈 길이 머니 어쩔 수 없는 일, 이제 발길을 돌려야 할 시간이다.

옛 용산면 땅 서쪽 끝 경계점인 484m봉(솔방등)을 지나면 비슬기맥은 화양읍 최상부 '송금리'(松金里) 구간으로 들어선다. 서편 송정마을과 동편 금곡마을을 하나로 묶은 행정 동리(洞里)다. 이 구간에서 비슬기맥이 흐르는 순차는 484m봉(솔방등)~370m재(보리절고개)~502m봉~270m재(성현재)~484m봉이다. 세 산덩이 사이에 재 두 개가 있는 모양새다.

484m봉서 내려서는 370m재의 위치는 금곡마을 뒷능선 복판이다. 그걸 마을에서는 '보리절고개'라 했다. 그 아래, 즉 마을 뒤 계곡 중간쯤에 있었던 '보리사' 절에서 유래했다는 얘기다. 보리사 신자 중에는 옛 용산면 사람들도 많았던지, 거기서 지형 지목 때 가장 쉽게 동원되는 이름도 '보리절'이었다. 지도나 현장 안내판은 '보리고개'로 줄여 표기한다.

보리절고개 동편에는 높이가 비슷한 380m 잘록이가 하나 더 있다. 금곡마을서 올라 온 경운기길이 둘을 이은 뒤 서편의 더 높은 산덩이로 뻗어 오른다. 그 길목을 주목할만한 '처진 소나무' 한 그루가 지키고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매전면 처진 소나무'에 못잖다는 사람이 있었을 정도다. 전문기관서 살펴볼 일이다.

보리절고개를 지나면 비슬기맥은 100m 이상 솟아 500m대 산덩이를 이룬다. 국가기본도는 그 중 가장 높은 502m봉에다 '안산'이란 이름을 붙여놨고, 현지서는 어떤 이가 그 다음의 490m봉에다 그 명패를 걸어 놨다. 하지만 '안산'(案山)은 대부분 마을 앞산을 가리킬 때 쓰는 보통명사다. 북편 경산 하도리의 안산이라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는가 싶다. 반면 남쪽의 청도 금곡마을서는 그걸 '논달 말랭이'라 불렀다. 여기까지가 금곡마을 뒷능선 구간이다.

'금곡'(金谷)은 '쇠실'을 한역한 마을 이름이라고 지명유래지에 설명돼 있다. 그런데도 현장서는 쇠실이 아니라 '숫골'이라 해야 통한다. 마을 입구 표석에도 그렇게 씌어 있다. '실'과 '골'은 계곡을 의미하는 같은 말이지만, '쇠'와 '숫'은 어떤 관계이기에 서로 통하는 것일까? 오직 발음 편의를 좇아 변음된 것일까? '쇠'가 '수'로 발음되기는 청도 이서면 문수리 수점마을과 달성 가창면 삼산리 수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문수리선 '쇠점'을 뜻으로 풀어 '鐵店'(철점)이라고까지 한역하면서도 발음은 '수점'으로 한다.

이런 중에 일부 '쇠실' 마을에선 한자 표기조차 아예 '所也'(소야)로 하는 경우가 있다. 청도읍 부야1리 '쇠실' 마을이 가까운 예고, 행정 동리 명칭에까지 당당히 '소야'를 채택한 먼 지방 사례도 있다. 흔히 '다부재'로 잘못 알려져 있는 칠곡군의 한국전쟁 격전지 '쐬고개'도 '소야재'다. 대동여지도 등 고지도에서부터 '鐵嶺'(철령)이 아니라 '所也峙'(소야치)로 표기해 온 것이다.

이런 여러 경우들을 함께 놓고 보노라니 자연스레 의문이 하나 고개를 든다. '숫'과도 통하는 '쇠'라면 그게 꼭 쇠붙이(鐵)를 가리키는 말이라고만 봐야 옳을까? 고지도까지 굳이 우리말 발음을 그대로 반영해 '소야'(쇄)라 표기하던 그 땅 이름이 정말 철이나 금과 관련돼 생긴 것일까? 하는 것이다.

만약 그게 금이나 철과 관련 없는 것이라면 사정은 전혀 딴판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쇠'가 '사이'(間)를 의미하는 '새' '샛'의 변음이라면, '쇠실'은 '무엇과 무엇의 사이에 있는 골짜기'를 뜻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부야의 '쇠실'이나 칠곡의 '쐬고개'는 '철이 생산되던 땅'이 아니라 길을 질러갈 수 있는 '사잇골' '샛골' 및 '사잇고개'일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이 시리즈가 이렇게 장황하게 '금곡' 혹은 '쇠실'에 집착하는 것은, 그게 전국에 흔하고 청도에 특히 많이 발견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 본래 의미를 제대로 찾아내는 것은 이 땅의 바른 이해에 필수적인 일일 수 있다는 뜻이다.

비슬기맥은 502m봉 다음의 490m봉에서 급락해 270m 높이의 '성현'(省峴) 혹은 '성현재'로 쏟아져 내렸다가 484m봉으로 다시 올라선다. 성현재 양쪽 봉우리 높이가 둘 다 490m 전후라는 뜻이다. 양쪽에 모두 헬기장이 있으니 그것도 공통점이다. 성현재는 저 높은 봉우리들 속에 200m나 낮게 푹 파묻혀 있는 것이다.

때문에 성현재서 다음 봉우리 오르기는 상당히 숨 가쁘다. 시간도 25분이나 걸린다. 그렇게 해서 도달하는 484m봉은 이름만큼 예쁘고 아기자기한 고찰 '동학산 대적사(大寂寺)'를 자락에 품은 봉우리다. 484m봉이 동학산이라 불렸던가 생각게 하는 대목이다.

484m봉서 비슬기맥은 남쪽으로 지릉을 하나 갈라 보낸다. 지나온 화양읍과 다음의 이서면을 가르는 산줄기다. 그러면서 얼마 후 둘로 갈라지고 다시 넷으로 나뉘면서 넓은 터를 장만해 스스로의 품안으로 화양읍의 중요한 마을들을 품어 들인다. 이서국 시대 이후 숱한 역사의 애환을 간직한 옛 청도의 중심지구다. 이 시리즈가 484m봉 남릉에 '이서국(伊西國)능선'이라는 특별한 이름표를 붙여 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서국능선 중 서편으로 갈라져 간 것의 끝부분엔 '토성산'(土城山)이라는 구릉이 있다. 이서국 왕궁 자리라 해서 청도군민체전 성화가 채화되기도 했다는 곳이다. 그러니 이쪽 산줄기는 별도로 '토성산능선'으로 구분해 두는 게 좋겠다.

토성산능선이 소쿠리처럼 둘러싼 땅 토평리 백곡마을은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의 연고지다. 불과 35살 나이에 무오사화로 희생된 청명했던 선비. 썩은 자들이 그 맑은 피를 제물 삼았으니 원통함을 어찌 다 말할 것인가. 백곡에 있는 종택, 혹은 그를 모시는 그 앞 청도천변 자계서원(紫溪書院)을 찾아 옛일을 되새기기라도 할 일이다.

이서국능선 중 동편으로 갈라져 간 것의 끝머리엔 '주구산'(走狗山)이 있다. 달아나려는 개(주구·走狗)의 형상을 한 산이라는 것이다. 그 산의 청도천변 끝자락엔 개를 떡으로 유혹해 머물도록 하기 위해 지은 절이라는 '떡절'(德寺·덕사)이 있다. 구릉 같은 저 주구산에도 산성이 있는 바, 이서국의 전초기지로 건설돼 그 치명적 패전 장소가 됐다가 신라를 침공하는 견훤 군대의 웅거지가 됐는가 하면 나중엔 고려가 잔존 신라세력을 싹쓸이하는 신라 완멸의 장이 되기도 했다는 곳이다.

이렇게 자락을 펼쳐가는 이서국능선이 토성산-주구산 지릉 둘로 갈리기 직전 구간에는 오래된 '긴골재'가 있다. 그 서편 지역민들이 남성현역으로 열차를 타러 갈 때 넘어 다니던 길목이다. 이서면 등의 여러 마을 사람들이 줄을 이었었다고 했다. 옛 어른들한테는 이서국 이야기보다 더 간절한 사연이 쌓였을 고개다.

그 너머 남성현역은 1905년 1월 경부선 철로 개통으로 각광받게 된 이 일대 교통의 핵이었다. 자동차가 극히 귀하던 시절 순식간에 최고의 장거리 교통수단으로 부상한 게 열차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 땅은 이미 그 훨씬 이전부터 교통의 요충지였다. 고려 때부터 '성현역'(省峴驛)이 설치돼 있었기 때문이다. 열차가 아니라 말 타는 역인 게 다르나, 말 또한 열차가 나오기 전까지 세계적으로 가장 빠른 교통수단이었으니 중요성은 다를 바 없는 셈이다.

그 시절 관리들의 공무 여행을 위한 역로(驛路)는 부산·밀양 쪽에서 유천역~성현역~시지~범어역(대구)을 거쳐 경상감영(대구)으로 이어져 있었다. 청도 아전들 또한 대구 경계의 담티재까지 나아가 신임 군수를 맞아서는 성현재를 넘어 부임지로 모셨다고 했다. 흔히들 팔조령을 통과하는 부산~밀양~청도~대구 노선이 '영남대로'라 해서 옛 교통의 중심축이었던 듯 여기기 십상이지만 실제는 그러잖았던 셈이다. 서민들은 그 길을 지나다녔겠으나 관료들에게 청도의 관문은 팔조령이 아니라 성현재였던 것이다.

성현역은 나아가 조선조 들어서는 지역 총괄역으로 격상되기까지 했다. 청도 6개, 밀양 5개, 창녕 3개, 달성 2개, 대구 1개(범어역) 등 17개 역이 그 관할 하에 편제됐다. 그 권역을 국가는 '성현역도'라는 이름으로 묶었다. 지금은 지방행정 구역로만 '도'(道)가 설정되지만, 그때는 역 관할단위도 '역도'(驛道)라 분류됐기 때문이다. 지금의 동대구역 권능이 이 역에 주어졌다고 보면 되려나 싶다.

그 영향으로 성현역 일대에는 거대한 역촌(驛村)이 형성됐다. 필요한 경비를 스스로 조달해야 해 넓은 논밭을 경작할 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여행하는 관료들을 뒷바라지하는 데도 사람이 많이 쓰였다. 일대 몇 개 마을이 역 직할로 들어갔으며, 숙박 공간 등 역의 건물 규모도 엄청났다. 때문에 '찰방'(察訪)이라 불리던 '역도'(驛道) 책임 '역장'의 격은 현령에 맞먹는 종6품이나 됐다. 본역에만 역리 및 역노비 등 114명(영남역지·嶺南驛誌)이 있었다 하고, 조선후기엔 1천 명에 달했다는 기록(여지도서·輿地圖書)도 보인다고 한다.

글 박종봉 편집위원

사진 정우용 특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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