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이듬해인 1946년 대구 민심은 흉흉했다. 정부의 쌀 배급정책 실패에다 콜레라 확산을 막기 위한 봉쇄 조치로 농작물과 생필품 공급이 끊겼기 때문. 참다못한 시민들은 10월 1일 기아 대책 마련을 요구하며 대구역 등에서 대대적인 시위에 나섰다.
대구운수노조 위원장이던 이병옥(당시 34세) 씨도 그 자리에 함께 섰다. 부녀자와 어린이, 학생과 교수 등이 가세해 시위대는 1만5천여 명으로 불어났고 이를 막던 경찰이 총을 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튿날까지 이어진 시위에 경찰은 다시 총부리를 들이댔고, 미 군정은 계엄령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대구 10월 사건'이었다.
시위 주동자로 분류됐던 이 씨는 대구형무소로 끌려갔다. 1950년 6·25전쟁 발발 직후 함께 수감돼 있던 국민보도연맹원들과 가창골로 끌려간 뒤 소식이 끊어졌다.
1일 대구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화합의 광장에서는 '대구 10월 사건 64주년 희생자를 위한 위령제'가 열렸다. '대구·군위·경주 국민보도연맹 사건' 희생자들의 넋을 함께 기리는 자리였다. 상복을 입은 유족 등 100여 명이 모인 이날 행사는 사건의 진실이 규명된 뒤 공식적으로는 처음 열린 추모제였다.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6·25전쟁 발발 직후 좌파에서 전향한 지역 국민보도연맹원과 시찰 대상자로 분류된 주민 102명이 대구 가창골과 경산코발트 광산 등에서 집단살해된 사건. 이때 '대구 10월 사건'으로 잡힌 이들도 상당수 희생돼 함께 위령제를 열게 된 것이다.
이날 오전 10시부터 희생자들의 넋을 하늘로 보내는 굿이 5시간여 동안 이어졌고 살풀이춤이 뒤따랐다. 추도 묵념, 추도사, 헌화와 분향, 추모 영상 상영이 이어졌다.
10월항쟁 유족회 채영희 회장은 "두 사건으로 희생된 분들을 추모하고 묻혀 있던 역사적 사건의 진실이 밝혀져 조금이나마 위안이 된다"며 "위령제를 통해 피해자들의 넋과 유족의 마음이 달래지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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