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김춘수의 '꽃' 중에서). 철없던 연애 시절에 누구나가 한 번쯤은 읊어보았음직한 구절이다. 제 빛깔과 향기에 어울리는, 더욱더 생생하게 피워 낼 수 있는 이름으로 불린다는 건 분명 엄청난 축복이다. 이름값도 못한다는 핀잔도 열없는 노릇이지만, 허울 좋은 빈 이름에 홀려 도깨비춤을 추는 꼴도 가관이다. 사람들은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해 이름을 붙여서 부르기도 하지만, 왕왕 붙여진 이름표에 목매달려 스스로조차 잊어버리고 넋을 놓고는 한다.
'엑스페리먼트'(Das Experiment, 2001)는 시작부터 우여곡절을 거듭한 영화다. 애초에 영화의 소재가 된 감옥 실험은 1971년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실제로 행해진 '환경조작에 따른 심리변화 실험'이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 인간은 극한 환경을 선한 의지로 이겨낼 수 있는 존재인가?'라는 인간 본성에 관한 의문을 과학적으로 파헤쳐보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거대한 가상 감옥이 설치되고 대대적인 신문광고를 통해 참가자를 모집하였다. 예정된 기간은 2주일, 그러나 실험은 5일 만에 예기치 못한, 혹은 예정된 파국으로 치닫고 만다. 영화 속의 첫째 날은 게임처럼 가벼웠다. 실험 진행을 위한 몇 가지 규칙만 마련된다. 둘째 날과 셋째 날, 한 잔의 우유로 빚어진 사소한 소동과 치기 어린 장난들이 점차 그들을 진짜 간수와 죄수로 몰고 가기 시작한다.
드디어 5일째, 첫 번째 살인이 발생하고 상황은 연구자의 통제조차 벗어난다. 애초 흥에 겨웠던 가장무도회장은 엉겁결에 뒤집어쓴 가면과 맨얼굴이 얼키설키 뒤얽히면서 걷잡을 수 없는 아수라장으로 빠져든다. 가면이 주는 묘한 마력에 취했다가, 점차 어느 것이 진짜 제 얼굴인지조차 혼란스럽다. 마침내 뒤엉킨 가면마저 뚫고서 그동안 억눌러왔던 모든 것들이 질풍노도처럼 쏟아져 나온다. '실험이 시작된 순간 당신은 해체된다!'라고 내걸린 문구처럼, 그 짧고도 긴 과정에 대한 냉엄하고 치열한 보고서이다.
얼마 전 미국판 '엑스페리먼트'(The Experiment, 2010)로 리메이크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나치 완장에 대한 끔찍한 악몽을 채 지우지 못한 독일의 달콤씁쓸한 과일이 먼 바다를 건너서 할리우드로 건너왔단다. 마냥 알록달록한 솜사탕으로 부풀려졌는지, 그나마 원래 맛을 달곰새금하게나마 담고 있는지 못내 미심쩍으면서도 궁금하다.
알량한 가면 뒤에서나 위세를 부리고 음험한 속내를 쏟아내는 모습은 안쓰럽다. 더욱이 뒤집어쓴 가면에 도리어 휘둘리거나 아예 뒤죽박죽이 되어 본디 얼굴조차 잊어버리는 것은 위태롭기조차 하다. "사람 되기는 힘들어도 괴물은 되지 맙시다." 어느 영화 속 주인공이 내뱉는 대사처럼, 사람 노릇하기 쉽지가 않다는 것이 곧 괴물처럼 살아도 된다는 면죄부일 수는 없지 않은가.
송광익 늘푸른소아청소년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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