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롱나무, 즉 목백일홍이 여름을 대표하는 꽃이라면 가을은 역시 국화의 계절이다. 여름 백일 동안 작렬하던 배롱나무에 달린 꽃들이 시들시들한 것은 가을이 성큼 다가왔음을 알리는 신호다. 가을꽃 국화 중에서도 백미는 들국화다. 야산과 들판에 핀 청초한 들국화 향기에 매료되지 않을 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런데 '들국화'는 관념적인 표현일 뿐 이런 이름을 가진 꽃은 없다. 들에 핀 국화과(科) 초본을 들국화라고 하는데 요즘은 종류가 많아 이름 짓기도 힘들 지경이다. 개망초, 금계국, 금불초, 개미취, 루드베키아 등 그야말로 들국화 지천이다. 이런 들국화 중에서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것은 그 이름도 아름다운 구절초(九節草)다.
구절초는 5월 단오에는 줄기가 다섯 마디가 되고, 9월 9일에는 아홉 마디가 된다고 하여 구절초라고 하였다. 또 음력 9월 9일에 꺾어 차나 약용으로 사용한다고 하여 구절초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아무튼 구절초가 한국인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것은 한국 토종 야생화이기 때문이다. 30, 40년 전만 해도 들판에는 구절초가 대부분이었다. 그때는 들국화=구절초라는 등식이 성립했었다. 오히려 코스모스가 더 귀한 시절이었다. 그러던 토종 구절초가 들판에서 사라졌다.
꽃이 크고 화려한 잡종에 밀려, 가녀린 하얀 잎을 동그랗게 두른 구절초는 식물도감에서나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구절초로 인해 '대박'을 터뜨린 사찰이 있다. 충남 공주시 장기면 영평사(永平寺)다. 주지 스님이 10여 년 전, 야산에 핀 구절초가 너무 아름다워 주변에 갖다 심었는데 이것이 사찰 주변을 온통 하얗게 물들였다. 조용하던 산사가 갑자기 시끌벅적해졌다. 구절초를 보겠다는 사람들로 넘쳐난 것이다.
지금은 사찰 진입로 약 2㎞ 양편도 구절초로 물들여 놓았다. 해마다 10월 초에 '구절초 꽃 축제'로 사람을 끌어들인다. 올해가 벌써 11회째다. 지난 일요일에 꽃이 반개(半開)했으니 오는 주말 절정이 될 것이다. 점심 공양 후, 절에서 제공하는 구절초 차 한 모금을 머금으니 '별유천지'가 따로 없다. 비로소 이 절에 사람이 붐비는 이유를 알 만하다.
국화가 샤넬로 화장한 얼굴이라면 구절초는 창포로 머리를 감은 조선의 여인이다. 그 고고한 자태와 은은한 향기,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역시 토종의 미(美)가 아니겠는가.
윤주태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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