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중기에 결성돼 지금까지 500년을 이어온 친목계(契)가 눈길을 끌고 있다. 경북 고령군 쌍림면의 벽송정 유계(碧松亭 儒契)는 관련 고문서로 볼 때 1520년대 결성된 것으로 보이며 현재까지 맥을 이어오고 있다.
영남문화연구원 인문한국사업 연구팀 오용원 교수는 "벽송정 유계의 역사를 기록한 일괄고문서인 입의(立議)는 1546년 최초로 기록되기 시작해 오늘날까지 12권의 책으로 묶여져 이어온다"며 "기록으로 볼 때 1520년대 결성된 것으로 보이며 회원 수가 적을 때는 20~30명, 많을 때는 300여 명에 달했다"고 밝혔다. 벽송정 유계 계원 자격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자손에게 세습됐으며 현재 회원은 100여 명이다.
이 계의 유사(有司·총무) 전병원(경북 고령군 쌍림면 송림리) 씨는 "유계는 현재도 매년 음력 4월 10일 벽송정에서 총회를 열어 전년도 결산보고, 임원 개편, 전답의 수곡 현황, 재산의 변동 등을 보고하고 추인한다"고 밝혔다. 기록으로 볼 때 이 같은 총회의 성격은 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벽송정 유계는 '벽송정'(碧松亭)이라는 정자와 그 일대 전답과 재산을 중심으로 유지돼 왔다. 자료로 볼 때 벽송정 정자는 활터였다. 계원들은 이 활터에 모여서 활을 쏘고 시문을 짓고 수련을 했으며 때때로 연회도 펼쳤다.
벽송정 유계는 조선시대 고령 지방의 양반들을 주축으로 하면서도 전국의 양반들이 참가한 것으로 나타나 향약 등이 지역 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것과 차이를 보인다. 명망 있는 고령 지역의 사족은 대부분 벽송정 유계에 가입했고 타 지역 사족들 중에서도 고령에서 관리로 근무했거나 고령 사람과의 인연으로 가입했던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이들은 벽송정에 모이는 행위를 통해 지역 유림의 여론을 주도하고 영향력을 키웠다.
이 계의 계원이기도 한 오 교수는 "벽송정 유계는 벽송정이라는 정자를 중심으로 정자를 유지, 보수하고 정자 소유의 전답과 재산을 관리했다. 소유 전답의 소출이 많았으며 예나 지금이나 재정이 상당히 튼튼하다"면서 "유계 사람들은 고령 지역의 구심체로 정자에 모여 학문을 닦고 고령 유림의 여론을 형성했으며 재산에서 나오는 이익과 세를 나누었다"고 분석했다. 이처럼 계가 오래 유지될 수 있었던 데는 벽송정과 일대 전답 등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벽송정 유계는 재산 관리에 철저했다. 그러나 30여 년 전에는 계원 한 사람이 편법으로 재산을 처분하는 사태가 발생해 위기를 겪기도 했다.
벽송정 유계는 가입 절차가 까다로웠고 계원 자격 유지도 까다로웠다. 세월에 따라 계원 자격이 조금씩 변하기는 했지만 대체로 세습된 계원이 아닐 경우 여러 사람의 추천과 동의를 받아야 가입이 가능했으며 참석률이 저조할 경우 벌칙이 주어지거나 계원 자격이 박탈되기도 했다. 향약의 벌칙이 주로 신체형인 데 반해 벽송정 유계의 벌칙은 술과 음식 등 재물로 행했는데 상벌 중벌 하벌로 나누어 경중을 가렸다.
벽송정 유계의 일괄고문서인 입의에 따르면 고령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문중은 고령군 도진리의 고령 박씨로 보이며 이들은 고려시대 때부터 이 지역에서 사족으로 굳건한 가문을 형성했고 여론을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오 교수는 "정자를 중심으로 계를 형성하는 경우는 다른 지방에서도 존재했으나 대체로 단기적으로 성립됐다가 해체됐으며 벽송정 유계처럼 일괄 문헌자료가 남아 있는 경우는 현재까지 발굴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영남문화연구원 인문한국사업 연구팀은 이 고문서를 바탕으로 이달 중 책을 발간할 계획이다.
한편 고령군 지방문화재로 등록돼 있는 벽송정은 신라 시대 때 최치원이 중건하고 상량문을 지은 것으로 보아 이미 그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중건한 것으로 보인다. 1920년 큰 수해가 나 여러 채의 건물이 쓸려가고 원래 자리에서 약 300m 떨어진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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