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아래서 꼭대기를 쳐다보면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까마득하다. 그러나 한 발 한 발 발밑만 보고 오르다 보면 마침내 정상에 다다르게 된다.
사람살이도 등산에 다를 바가 없다. 인생의 길을 굽이굽이 다 꿰고 있으면 누가 감히 그 길을 선뜻 나서겠는가. 가는 길이 가파르더라도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며 하루하루를 산다. 그 하루의 발자취가 모여 일 년이 되고 일 년이 모여 한 사람의 일생이 된다.
가끔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굽이굽이 돌아온 길이 아스라하게 멀리 펼쳐진다. 계곡 물을 건너고 골짜기를 넘어왔다. 바람에 휘둘리기도 하고 비에 젖기도 했다. 한 시도 긴장을 늦추지 못했던 예측불허의 길, 끊어질 듯 이어져온 그 길은 내 삶의 궤적이다.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고 일어나기도 하며 앞만 보고 걸었다. 언젠가부터 주위가 보이기 시작했다. 풀꽃도 보이고 숲도 보였다. 물 소리도 들려왔다. 그 안에 깃들인 작은 생명들도 눈에 들어왔다. 보이는 것 모두가 아름답다. 숲을 쓰다듬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까지도.
가파른 오르막을 지나 정상을 넘어섰지만 나의 산행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내려가는 길이라고 만만한 것만은 아니다. 어쩌면 오르막길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다. 가끔은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도 있지만 올라가야 한다는 부담감으로부터 해방된 마음, 그것이 내리막길의 여유다.
내가 젊었을 적 늘 꿈꾸었다. 귀가 순해진다는 이순을 넘기면 손 놓고 마음 내리고 여생(餘生)을 즐기리라고. 여유롭고 편안한 노후, 빈 손, 빈 마음, 낭비해도 좋은 시간, 아침 햇살을 배경으로 희끗희끗한 머리를 이고 화초에 물을 주는 기품 있는 늙은이, 내 노년의 그림은 그런 것이었다. 그것은 아련한 희망이자 행복한 꿈이었다. 그리고 굽잇길을 돌아 나오는 힘이었다. 아무도 약속한 적이 없는 그날을 나는 보증수표라도 받은 양 철석 같이 믿으며 걸어 왔다.
그 나이에 다다랐을 때 그것은 조금 뒤로 물러섰다.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노라고. 몇 번을 주춤거리며 물러서기를 한 지금도 나는 '아직'이라고 말한다. 해야 할 일,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에 쫓겨 남는 시간이 없다. 여생이라고 할 수 없다. 하루 스물 네 시간이 모자라는 나의 삶은 아직도 치열하다. 현재진행형이다. 그리고 상기도 내일을 계획하며 세상 한복판에 서 있다.
몇 살이 되면 쓰고 남는 시간 '여생'이 될까. 어디쯤에서 잘라서 남아도는 삶 '여생'이라고 이름 지을까. 마음속에 열정을 잃어버리는 날, 편안함을 추구하며 안주하는 날, 아마도 그날부터 여생이 시작될 것 같다. 이러다가 어쩌면 내 생애에 영영 만나지 못 할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박헬레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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