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미적 취향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그리스 시대에는 풍만한 여성이 미인 대접을 받았지만 요즘은 깡마른 여성이 오히려 인기다. 이처럼 미적 기준은 변하지만 오랫동안 여인들의 사랑을 받아온 취미가 있다. 바로 자수다.
요즘이야 손으로 직접 자수를 놓는 사람들을 보기 어렵지만 자수의 역사는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장 오래된 자수 실물은 기원전 13세기 것이라 하니 자수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오늘날 서울 인사동 등지에서 전통 공예품으로 팔리고 있는 자수 제품은 대부분 중국에서 제작된 것이고 일부 침구 등에 사용되는 자수는 기계수가 대부분이다. 자수가 주로 사용되던 침구류는 침대 생활로 그 필요성이 사라졌고, 자수가 사용되던 보자기, 수저집 등은 기성품으로 대체되면서 우리나라 고유의 자수를 구경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최근 한복 디자이너이자 자연주의 살림꾼으로 유명한 이효재가 규방공예 문화를 적극 소개하는 한편 직접 물건을 만들고 꾸미는 DIY 문화가 유행하면서 자수 역시 재조명 받고 있다. 지금은 자수 전문가들이 '규방공예'의 한 분야로 문화센터 등에서 취미 수강생들에게 자수를 가르치면서 그 맥을 잇고 있다.
우리나라 고유의 자수는 단순하고 소박하면서도 은은한 색감이 특징이다. 일본 자수가 기교와 장식이 강한 것과 다르다. 우리나라 자수 기술은 4세기 무렵부터 일본 자수의 발전에 영향을 줄 정도로 수준이 뛰어났다.
현재 남아있는 대부분의 자수 유물은 조선시대 후기에 남겨진 것들이다. 김영란 건국대 디자인대학원 교수에 따르면 조선시대 자수는 전라도 순창 지방의 자수가 유명한데 지역 특산물로 취급되며 보부상을 통해 전국에 보급되기도 했다. 김 교수는 이것이 조선시대 민수(民繡)의 대표적인 것이라고 꼽는다. 민수는 일반가정에서 부녀자들이 생활에 필요하거나 창작적 욕구로 놓은 수로, 보고 느낀 그대로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어 획일적인 형식의 궁수(宮繡)와 차이를 보인다. 당시 자수는 바깥활동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여성들이 만들어낸 규방 예술이다.
20세기 초 근현대 자수는 서양과 일본 자수의 영향으로 변화를 겪었다. 1945년에는 국내 최초 미술대학이 이화여대에 설립되고 미대 안에 '자수과'가 생길 정도로 당시 자수는 보편적이고 인기 있는 문화였다. 1970년대 들어 정부의 경제개발정책과 더불어 전통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자수 전문 교육기관이 설립되기도 했다.
이경숙 동재민화연구소장은 "1970년대 정부가 자수를 산업화하려는 노력도 있었다"고 말했다. 젊은 여성들이 일자리를 찾아 농촌을 떠나는 것을 막기 위해 농촌에 자수를 보급해 생산하도록 한 것. 농어촌 청소년과 부녀자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정책이었다. 그래서 1970년대 자수는 비슷한 문양과 기법으로 형식화된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이후 기계자수가 도입되면서 자수를 직접 놓는 문화는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입식문화로 바뀌면서 주로 침구에 사용되던 자수의 실용성은 급격히 떨어졌다.
흥미로운 것은 십자수의 역사다. 자수의 하나인 십자수는 2000년대 초반, 젊은이들 사이에서 한때 크게 유행했다. 지금은 그 인기가 많이 수그러들어 십자수 가게를 발견하기 어렵지만 근현대 100여년 이상 우리나라 여성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터키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십자수는 이탈리아에서 유럽으로 전해지며 조선 말기 개항 및 1910년 한일합병을 거치며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특히 해방 후부터 기계 자수가 생기기 시작한 60년대 전반까지 대유행하게 된다. 여가 있는 여인들이나 혼전 여인들의 혼수품으로 일대 유행병처럼 번졌던 것. 당시 집에 귀한 손님이 방문했을 때 가장 먼저 방석을 내놓았는데 방석에 놓인 자수로 안주인은 은근히 자신의 정갈한 살림 솜씨와 자수 솜씨를 자랑했다. 십자수는 양복보, 횃댓보, 방석, 베갯잇, 상덮보, 인두판, 수건, 베갯모 등 다양한 생활용품에 널리 사용됐다. 1945년 해방 이후 미군정을 거치면서 십자수에 '스위트 홈'(sweet home)과 같은 영어를 새겨, 영어에 대한 상식을 자부심과 과시용으로 자수 문양에 사용하기도 했다.
이 소장은 "민화가 작가 개인이 아닌 민족 공동의 감성을 표현하는 것처럼 십자수는 20세기 초 근대 여성들이 가지고 있었던 민족 공동의 미감과 사적 감정까지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면서 "한 땀 한 땀 기도하듯 아름다움을 만들었던 민수(民繡)인 십자수는 다수의 여성에 의해 주도됐던 마지막 예술양식"이라고 말했다.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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