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간이역/ 구석진 곳부터 싸늘히 식고 있다/ 고개 돌린 해바라기가 건너다 보는 들녘/ 하롱하롱 고추잠자리 떼/ 액자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직한 담장에 기대어 선/ 개망초 시든 이마 쓰다듬고 있다/ 기차는 좀처럼 오지 않고/ 시선 자주 역사 밖 철로를 서성이는 여자/ 비스듬히 길어진 그림자/ 흔들어 깨우는 스피카의 비음/ 새마을호 열차를 먼저 보내는 관계로 무궁화호 열차가 연착하겠음을 알리는 사이/ 저무는 들녘/ 빤한 길속으로 휘어진 햇살/ 꽁무니 말아 쥐며 달아나고 있다/ 언제쯤 기차는 여자를 만나러 올까-김기연 작 '기차는 올까'
여심(女心)이 가을을 만나면 여자는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진다. 가을을 대면하는 여자와 남자의 마음은 흑백 사진의 명암처럼 구분된다. 남자는 1년 내내 무덤덤하게 살다 단풍이 들고 낙엽이 떨어져야 가을이 왔음을 느낀다. 하지만 여자는 찬바람만 불어도 가을을 느낀다. 시각적 변화를 통해 가을을 감지하는 남자와 달리 여자는 감성을 열어 놓고 온몸으로 계절의 변화를 감지하기 때문이다.
여자에게 가을은 '잔인한 계절'이다. 특히 중년의 여자에게 가을은 공허함으로 다가온다. 여자는 결혼을 하면 생활에 자신을 묻고 산다. 소중한 자신의 이름보다 누구 엄마로 살아온 세월이 길수록 여자가 느끼는 상실감은 깊이를 더한다. 마음 한구석이 시려오는 가을, 자아를 찾고 싶은 꿈틀대는 욕망을 안고 여자가 길을 재촉하는 이유다.
깊은 가을, 여류 시인 김기연 씨가 여행을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불청객(?)처럼 동행했다. 40대 중반의 나이, 두 아이의 엄마, 시를 쓰는 시인에게 가을은 어떤 색깔로 다가올까? "여자로서 느끼는 감성을 고스란히 시어로 토해 내야 하는 가을은 견디기 힘든 고통처럼 다가옵니다. 매년 가을 여류 시인이 크고 작은 가슴앓이를 하는 까닭입니다. 자기 속으로 들어가 가늠할 수 없는 고독의 늪에서 자신의 시어 하나를 건져 올리고 싶은 몸부림을 주체할 수 없을 때 집을 나섭니다."
시인이 선택한 여행지는 군위군 산성면에 위치한 화본역이다. 화본역은 누리꾼들로부터 아름다운 간이역으로 뽑힐 만큼 빼어난 정취를 자랑하는 곳이다. 화본역은 황금빛 물결이 일렁이는 들판을 굽이굽이 가로지른 중앙선 철길 모퉁이에 아담하게 붙어 있다. 한때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을 실어 나르던 분주한 역이었지만 지금은 한적하다 못해 철길 따라 적막이 흐른다. 하루 여섯 번(상·하행 각 3번) 정차하는 무궁화호 열차가 아니면 고요를 깰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영천이 지척이어서 영천 5일장이 서는 날이 돼야 겨우 역사에 사람 내음이 날 만큼 인적도 드물다. 과거의 영화를 간직한 채 덩그러니 서 있는 급수탑(일제강점기 때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세운 탑)이 처연하게 다가오는 화본역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기차를 기다리는 것은 철로를 향해 고개를 내민 빨간 사루비아뿐이다. 곧게 뻗은 철길이 산과 맞닿을 듯 이어져 있는 가을 화본역 여행에서 시인이 마주한 것은 추억과 그리움이다.
"마치 산으로 철길이 들어가는 형국이네요. 철로를 품고 있는 산이 자궁을 닮아 어머님 품같이 포근함이 느껴집니다. 그 포근함이 눈물샘이 되어 그리움을 더 자극합니다."
시골 출신인 시인은 6남매의 막내로 가족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자랐다. 근엄했던 안동 김씨 종손인 아버지도 막내딸만큼은 손수 안아 키울 만큼 귀여움의 대상이었다. 부엉이 울음소리에 잠을 깬 어느 겨울 날, 마당에 쏟아지는 달빛에 취해 한동안 넋을 놓고 앉아 있을 정도로 풍부한 감성을 지닌 소녀였다. 도회지로 공부하러 나간 오빠, 언니들이 보고 싶을 때면 소녀는 편지로 그리움을 달랬고 그때의 감성이 소녀를 시인으로 이끌었다.
"기분이 울적하거나 누군가 그리워질 때 완행 열차를 타고 여행을 떠납니다. 간이역은 어릴 적 가졌던 구름 같은 꿈을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기차를 타고 간이역에 가면 부모님과 언니, 오빠들이 나를 마중 나와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시인의 시집에 기차 여행을 소재로 한 시가 많이 등장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화본역을 떠나 오면서 시인은 오늘 저녁에는 시를 쓸 것 같다고 했다. "짧은 여정이었지만 진한 아쉬움이 남는 간이역 여행이 한 장의 그리움으로 남을 것 같네요. 떠남과 만남이 공존하는 간이역은 바람을 닮았습니다. 한없이 돌고 도는 바람이 잠시 머무는 간이역에는 우리가 두고 내린 낭만과 추억이 있습니다. 여심을 자극하는 가을, 간이역에 서면 생각지 못한 추억을 만나고 새로운 자신의 모습도 볼 수 있게 됩니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사진·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김기연 시인 약력
*경북 의성 출생
*1993년 '한국시'로 문단에 등단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수료
*시집 '노을은 그리움으로 핀다' '소리에 젖다'
*한국문인협회, 대구시인협회, 한국작가회의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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