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운문서 화악까지] [42]우록리 외곽 구간

세 봉우리 나란히 선 삼성산, 세 성인이 나왔다는 전설도…

우록리 높은 곳에서 바라본 자양산 구간 비슬기맥. 맨 왼쪽으로 보이는 게 자양산 정상의 대바위 봉우리이고, 반대편서 더 오른쪽으로 가며 삼성산 세 봉우리가 이어진다.
우록리 높은 곳에서 바라본 자양산 구간 비슬기맥. 맨 왼쪽으로 보이는 게 자양산 정상의 대바위 봉우리이고, 반대편서 더 오른쪽으로 가며 삼성산 세 봉우리가 이어진다.

'팔조령'은 조선시대 기록에 '최정산 팔조령'으로 나타나고 근세엔 '삼성산 팔조령'으로 표시된 고개다. 흔히 서울~부산 간 최단거리 코스라 하며, 조선시대 '영남대로' 경유점이고 임진왜란 때 왜군의 중요한 북상코스였을 뿐 아니라 경부선 철로 통과지로 내정됐던 곳이라는 얘기도 있다. 중요한 길목이란 뜻이다.

하지만 실제 대우는 그만하지 못해, 옛날엔 역로(驛路)에서조차 제외됐던 듯하고 자동차도로 또한 이제 와서야 투자가 이뤄지고 있을 뿐이다. 팔조령이란 이름을 두고 여러 얘기가 나돌지만, 그것 역시 글자풀이의 결과일 뿐 '八助'(팔조)는 순수 우리말 이름의 음을 표기한 이두식 한자일 것이리라는 시각이 유력하다. '팥재' 같은 게 그 본명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지형도 상 팔조령 높이는 380여m, 터널은 해발 250m 정도로 읽힌다.

팔조령 이후 비슬기맥은 11km 정도에 걸쳐 니은(ㄴ)자 모양을 역순으로 그려간다. 동에서 서로 6km쯤 진행한 후 북으로 방향을 바꿔 5km가량 이어가는 것이다. 니은(ㄴ)자 능선 북동쪽은 대부분이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공간이다. 그래서 이 11km 구간은 '우록리 외곽능선'으로 파악하는 게 가장 간단할 수 있다.

반면 그 맞은편에는 청도의 여러 마을들이 분포했다. 동·서 구간 남쪽에는 이서면 팔조리-신촌리-수점마을(문수리)-문수마을(문수리)-수야리-칠엽리, 남·북 구간 서편에는 각북면 지촌(덕촌리)-웃지슬(지슬리)-아랫지슬(지슬리) 마을이 자리했다.

팔조령 이후 동·서간 지형 구성은 대체로 봉화산(474m)~자양산(585m)~바람골재(528m)~삼성산(668m)~수야밤티재(535m) 순으로 돼 있다. 그 중 봉화산은 옛날 봉수대 자리라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부산 쪽에서 올라오는 통신을 청도 남산의 남봉대(南烽臺)로부터 이어받아 대구 법이산봉대로 이어주던 '북봉대'가 그것이다. 하지만 봉수대 터 안내판이 서 있는 곳은 그에 앞서 닿는 419m 첫 봉우리다.

봉화산은 419m봉서 13분가량 더 가야 도달한다. 청도서 팔조령 오를 때 왼편으로 죽 내려 서 보이는 산줄기의 꼭대기다. 거기서 내려서는 저 능선은 474m봉-431m봉-308m봉으로 이어가며 팔조리와 신촌리를 가른다. 308m봉은 유야무야한 구릉인데도 국가기본도가 '자양산'이라 잘못 지목해 놨으며, 431m봉은 팔조령 오를 때 474m봉보다 더 부각돼 보이는 그것이다.

비슬기맥은 봉화산을 지나 20여분 후엔 평평한 530m 분기점에 오른다. 북편 우록리 공간이 내려다보이기 시작하는 곳이다. 팔조령-봉화산 구간을 벗어나 '자양산' 권역에 도달했음을 알리는 징표다. 둘을 나누는 뚜렷한 지표는, 저 530m 분기점서 거꾸로 갈라져가는 지릉이다. 지나온 비슬지맥 본맥과의 사이에 채석장 골짜기를 형성하는 그 지릉은 곧 445m 잘록이로 추락했다가 철탑이 선 482m봉으로 솟은 후 폐 채석장 자리서 맺는다. 어르신들은 482m봉은 '자라바위봉'이라 했고, 폐 채석장 자리엔 본래 '부엉덤'이라는 특출한 단애가 있었다고 했다. 삼산리 마을서 소송까지 내고도 못 지켰음을 한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자양산 정점은 530m분기점과 4분 거리에 있는 585m-582m 바위 쌍봉이다. 570m 잘록이를 사이에 두고 한 산덩이에 나눠 솟은 것이다. 우록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유일한 전망대인 저걸 어르신들은 '대바우'라 했다. 다른 지방에도 간혹 보이고, 대부분의 경우 '널찍한 전망대 바위'라는 뜻의 '臺岩'(대암)으로 한역되는 명칭이다. 하지만 이곳서는 '큰바위'(大岩·대암)로 이해했는지 '大岩山'(대암산) '大岩寺'(대암사) 등의 표기가 우록 쪽 도로변에 보인다. 현장에도 누군가가 근래 페인트로 '대암봉'이라 써 놨다.

하지만 그 일대 산의 전래 명칭은 '자양산'(紫陽山)일 것으로 판단됐다. 임진왜란 시기에 살았던 모하당 김충선 장군 문집 고지도부터 확인되는 바다. 장군이 별세했을 때 이 산에서 '붉은 빛'(紫陽)이 솟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 그 일로 해서 '자양산'이란 이름이 유래한 것 아닌가 싶다. 그래서인지 옛날부터 산 북편 우록 자연마을은 '자양동'이며, 산 남쪽 신촌리 골 끝 저수지 이름은 '자양지'이다. 그리고 지금 또한 양쪽 어르신들은 모두 그 산을 자양산이라 부른다. 전체 산덩이는 '자양산', 최고점에 있는 암괴는 '대바위'라고 정리하면 될 것 같다.

자양산 능선은 앞서 본 부엉덤서 자라바위봉과 대바위를 거쳐 도달하는 583m봉까지라 보면 될 듯했다. 우록서는 대바위가 돌출해 보이고 신촌서는 583m봉이 산 전체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덩치 커 보이는 것은 그 능선이 북으로 불룩하게 휘었기 때문이다. 10분 거리의 두 봉우리 사이 우록 쪽 골은 '대바위골', 신촌 쪽 골은 '작은골'이라 했다. 583m봉은 신촌리와 수점마을을 가르는 분계능선 출발점이다.

583m봉을 넘어서면 산줄기는 다시 528m 잘록이로 떨어진다. 일대 옛 사람들의 생활에 중요했던 '바람골재'라고 했다. 우록 사람들은 이걸 넘어 이서장에 다니고, 쇠점 사람들은 그걸 넘어서 대구로 내왕했다고 했다. 재 북편 골은 '바람골'이라 했다.

바람골재 이후는 삼성산 권역이다. 재에서 20여분 만에 도달하는 613m봉이 그 전초봉이다. 거기서는 쇠점마을과 문수마을을 가르는 지릉이 남쪽으로 내려서는 바, 그걸 타고 임도가 솟아올라서는 대바위봉 아래 신촌리 골 안까지 감아 돈다. 길이 4.5km의 그 임도를 타면 저 남쪽 들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현지에선 "세 성인이 나서" 삼성산이라고 한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름은 산 형태에서 온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 정상부가 653m-668m-663m짜리 세 봉우리로 구성됐기 때문이다. 동편 653m봉에서 내려서는 북릉은 395m 잘록이로 낮아졌다가 마지막에 438m봉으로 되솟아 우록리 당산(堂山)이 된다고 했다. 둘째이자 최고인 668m봉에선 남릉이 내려서서 문수리와 수야리를 구분 짓는다. 세 번째 663m봉 구간은 능선이 좁고 길면서 평탄해 마치 솔밭 산책로를 걷는 듯하다.

삼성산 서편엔 603m봉이 또 다른 엄호봉으로 솟았다. 동편의 613m봉에 대칭된다고나 할까. 하지만 거길 지나면 산줄기는 535m재로 급락한다. 북편 우록리 밤티골 하백록 황새들마을과 남쪽 수야리 절골 귀일마을을 잇는 임도가 통과하는 '밤티재'다. 수야리 쪽에서 땔나무를 해 대구로 팔러 다니던 고갯길이자, 우록마을서 풍각장을 내왕하던 길목이라 했다.

하나 그 못잖게 주목할 점은, 조선조 중후기에 발달하는 고지도들과 지지들이 청도 서쪽 경계의 상징으로 거명하는 '율현'(栗峴)이 바로 이 밤티재일 가능성이다. 옛날 청도 서쪽 끝이 현재의 이서면이었던 데다 이 밤티재가 바로 이서면의 서쪽 끝 경계능선을 물고 있기 때문이다. 밤티재 서편 두 번째 봉우리인 593m봉서 출발해 내리는 홍두깨산 능선이 그것이다.

저런 경계 문제의 바닥에는 풍각-각북-각남 등 세 면(面)의 소속이 청도-밀양-대구-청도로 바뀌어온 역사가 깔려 있다. 예를 들어 각북은 고려시대까지 대체로 청도군 소속이었으나 조선조 들면서 밀양 소속으로 옮겨졌다가 1700년대 이후엔 대구 소속으로 변경됐으며, 1900년대 들어서야 청도로 환원됐던 것이다.

밤티재를 통과한 뒤 산줄기는 583m봉으로 올라섰다가 홍두깨산능선 분기점인 593m봉으로 건너간다. 비슬기맥이 동·서 주행을 그만두고 북으로 방향을 바꾸는 전환점이다. 그래서 그 이후의 기맥 능선과 홍두깨산능선은 593m봉을 접점으로 한 줄로 이어져서 풍각~각북~헐티재 구간 찻길의 동편 담장이 된다.

593m봉을 지나 비슬기맥이 북으로 향하는 초입에 '갖골재'라 부르는 얕은 잘록이가 있다고 했다. 갖골은 서편 지촌마을의 본명이니, 갖골재는 그 마을로 길이 이어지는 고개를 뜻할 터이다. 밤티재와 경운기길로 이어져 있는 그 잘록이가 아닐까 싶다.

갖골재 이후 주목할 지형은 629m봉이다. 거기서 서쪽으로 지릉이 내려서서 지촌마을과 지슬리를 가르기 때문이다. 그 능선 끝에는 '솥박지'(491m)라는 봉우리가 매우 특출하게 솟았다. 헐티재나 그 아래 금천리서 남쪽으로 내려설 때 정면으로 가장 두드러지는 지형이다. 지슬리서 '무지'(기우제) 지내던 봉우리라 했다.

629m봉을 지나면 또 하나의 '밤티재'가 기다리고 있다. 앞서 본 밤티재가 우록과 수야리를 잇는 것이었던 반면 이것은 우록과 지슬리를 잇는다. '수야밤티재' '지슬밤티재'로 나눠 불러두면 변별력이 생기려나 싶다. 둘은 30여분 거리로 떨어져 있다.

양쪽 마을들로 이어가는 산길이 지금도 뚜렷한 지슬밤티재(574m) 윗부분은 마당같이 평평하다. 하지만 재를 지나면 산줄기는 본격적으로 높아진다. 724m-747m-747m 세 봉우리를 이어가며 북편의 백록과 남쪽의 하백록(밤티골)을 가르는 '우미산'으로 1차 상승한 후, 최정산 권역을 향해 2차로 도약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산길은 우미산을 빼먹고 지슬밤티재서 그 산 북편의 '지슬재'(607m)로 수월하게 이어간다. 되도록 힘을 덜 들이고 넘어 다녀야 했던 생활용 산길이란 뜻이다. 옛 백록 어른들은 마을 남쪽 '도독골'을 걸어 지슬재로 오른 뒤 저 산길로 우미산을 우회하고 지슬밤티재를 거친 다음 갖골재서 지촌마을로 내려 가 풍각장을 다녔다고 했다.

지슬재 이후 산길은 652m 잘록이(송전탑) 등을 그쳐 드디어 이 구간 최고점 802m봉으로 올라선다. 한순간 북서쪽으로 거대한 평원이 펼쳐져 보이기 시작하는 백록마을 뒷산이다. 헬기장이 있는 802m봉, 다음의 781m재, 마지막 794m봉 등으로 구성된 이 산덩이를 인근 마을서는 '청산'이라 불렀다.

마지막 794m봉서 비슬기맥은 방향을 바꿔 비슬산을 향해 본격 서행(西行)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반대 방향으로도 지릉을 하나 남겨주니, 남쪽 우록마을과 북편 가창면 주리(蛛里)를 가르며 동진(東進)하는 남지장사 뒷산줄기가 그것이다.

이 남지장사 능선은 '거미골재'(686m)로 낮아져 두 마을 간 통로를 내 주고는 740m봉으로 되솟은 다음 남북으로 둥그렇게 갈라진다. 그 후 동편의 옥분리로 통하는 옥분재(581m)로 떨어졌다가 다시 656m봉으로 솟으니, 이게 우록 본마을 뒷산이다. 그 마을 어르신들은 656m봉을 '잣덤'이라 불렀고, '조리바위'가 그 상징물이라고 했다.

글 박종봉 편집위원

사진 정우용 특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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