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 속에 있는 골수는 백혈구, 적혈구, 혈소판 등 혈액 세포를 만드는 곳이다. 백혈병은 이 곳에서 비정상적인 백혈구(백혈병 세포)가 지나치게 생겨나 정상 백혈구, 적혈구, 혈소판의 생성을 억제하는 혈액암이다. 정상 백혈구가 감소하면 면역기능이 떨어져 패혈증을 일으킬 수 있고, 적혈구가 줄면 빈혈 증세(어지러움, 두통, 호흡곤란)를 보이며, 혈소판이 줄면 쉽게 출혈한다. 넘쳐난 백혈구는 몸 구석구석에 남아 고열, 피로감, 뼈의 통증, 설사, 의식저하, 호흡곤란, 출혈 등을 일으키며, 생명까지 위험해진다.
경북대병원 혈액종양내과 손상균(49) 교수는 백혈병 치료의 새로운 장을 연 인물이다. 골수이식의 위험과 불편을 없앤 '말초혈액 조혈모세포 이식'을 처음 시도했고, 이후 SCI(과학기술논문 색인지수)급 관련 논문 80여 편을 발표하기도 했다.
◆말초혈액 조혈모세포 이식, 첫 도입
급성 골수성 백혈병을 치료하려면 골수 이식이 필요하다. 항암치료보다 3~10배 강력한 항암제를 써서 암세포를 거의 없애야 한다. 골수를 거의 비우는 상태다. 이를 '골수 파괴성 전처치'라고 부른다. 이런 뒤에 환자와 조직적합성이 맞는 골수를 이식한다. 아무리 강한 항암제를 써도 암세포는 남아있게 마련. 남은 암세포는 이식된 골수에서 생성된 백혈구가 박멸하게 된다.
얼핏 간단해 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수술이다. 무엇보다 가뜩이나 면역기능이 떨어진 환자의 골수를 완전히 비움으로써 미미한 세균 공격에도 거의 무방비 상태로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이식된 골수는 아무래도 원래 환자의 몸과는 맞지 않게 마련. 여기서 생성된 백혈구는 암세포를 공격하는 것은 물론 정상 세포조차 남의 것으로 인식해 공격할 수 있다. 암세포 공격은 '종양효과', 정상세포 공격은 '숙주반응'이라고 부른다. 골수 이식은 바로 숙주반응과 종양효과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로 표현할 수 있다.
손 교수는 "1998년 이전까지만 해도 엉덩이 윗쪽에서 골수를 뽑아서 이식했다"며 "모두 1천㏄가량 뽑아야 하는데 1회 추출시 대개 5~10㏄를 뽑기 때문에 100차례 이상 찌르고 뽑기를 반복해야 한다"고 했다. 골수이식을 하는 이유는 피를 만드는 세포, 즉 건강한 조혈모세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세포는 골수에만 존재한다. 하지만 성장인자 주사를 4, 5일간 맞으면 조혈모세포가 골수를 떠나 혈액 속에 돌아다닌다. 여기서 착안한 것이 바로 '말초혈액 조혈모세포 이식'이다. 마치 헌혈하듯이 피를 뽑아서 조혈모세포만 분리해낸 뒤 환자에게 이식하는 방법.
◆20여개의 세계적 연구 진행 중
손 교수는 1998년 경북대병원에 혈액이식센터를 만들자마자 바로 말초혈액 수술부터 시작했다.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예전엔 골수이식을 젊은 환자에게만 했다. 노인의 경우, '골수 파괴성 전처치'에 쓰는 강력한 항암제를 견디지 못해 숨질 수 있기 때문.
하지만 말초혈액 수술은 충분히 가능했다. 아울러 2000년부터 '골수 비파괴성 전처치', 즉 항암제 사용을 줄여 전처치의 부작용을 없애는 방법이 도입된 뒤 말초혈액 수술은 크게 늘게 된다. 말초혈액에는 암세포를 공격하는 T-림프구가 많다 보니 비파괴성 전처치 이후 남아있는 체내 암세포를 보다 효율적으로 없앨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재생불량성 빈혈을 제외한 모든 수술에서 말초혈액 수술을 씁니다. 10건 중 8, 9건인 셈이죠." 손 교수는 지금까지 300례 이상의 백혈병 수술을 했다. 1998년 '말초혈액 조혈모세포 이식' 관련 논문을 국내에서 처음 발표한 것도 바로 손 교수다. 국내 병원들이 말초혈액 수술을 시작한 때가 2002, 2003년부터임을 감안하면 그가 얼마나 앞서 갔는지 짐작할 수 있다. 꾸준한 임상연구와 논문 발표 덕분에 현재도 20개 이상의 세계적 연구가 진행 중이다. 신약과 새로운 치료법 연구에서 다국적 제약회사는 늘 그를 찾는다.
"글리벡 출시 이후 만성 골수성 백혈병 환자는 이식이 필요없이 장기간 생존이 가능합니다. 문제는 환자가 의사 이상의 지식을 가져야하고, 그래야 약을 꾸준히 먹는 중요성도 깨닫게 됩니다." 이를 위해 매년 2차례 환자들과의 간담회를 갖는다. 매달 첫 월요일엔 만성 환자만 치료하는 별도 클리닉도 운영한다. 제약회사와 연계한 콜센터를 만들어 수시로 상담이 가능하게 했다. 그가 돌보는 만성 환자만 120여 명에 이른다. 전국에서 만성 환자의 수도권 유출은 대구가 가장 적다. 서울까지 갈 필요없이 손 교수를 찾으면 되기 때문이다.
◆백혈병은 너무도 애처로운 병
1997년 미국 프레드허친슨골수이식센터에서 연수할 당시 병원장에게 세 차례나 장문의 편지를 써서 혈액이식센터의 필요성을 호소했고, 결국 이듬해 3월 그가 귀국한 뒤 넉 달만에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첫 말초혈액 수술환자는 40대 남성이었어요. 서울 유명 병원에서도 치료에 실패한 뒤 저를 찾아왔더군요." 다행히 수술 경과는 좋았고, 그 결과는 미국혈액학회지에 실렸다.
아찔한 경험도 들려주었다. 급성 골수성 백혈병이 재발한 50대 여성 환자의 이야기. 면역력이 크게 떨어진 상태에서 곰팡이균 감염이 염려스러워 항암제를 종전보다 3분의 2만 쓰도록 처지했더란다. 그런데 며칠 뒤 갑자기 환자의 상태가 극도로 악화됐고 고열에다 피를 토하는 바람에 중환자실로 옮겨 산소호흡기까지 달아야할 지경이 됐다. 알고 보니 주치의 계산 착오로 3분의 2를 써야할 항암제를 2분의 3, 즉 1.5배나 많이 썼음을 알게 됐다. 기적을 바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환자는 6주 만에 건강을 되찾아 퇴원했고, 이후 백혈병 완치 진단을 받았습니다. 병원에 올 때마다 고맙다며 인사를 하는데 미안하고도 다행스럽죠." 의학적으로 설명하자면 환자는 암세포 박멸효과를 극대화하는 고용량 치료를 받은 셈. 상용량보다 3배 이상 항암제를 쓰는 이 치료법은 요즘엔 보편적 치료법이지만 당시만 해도 의료진 실수(?)로 선진 치료를 받은 셈이 됐다.
"백혈병은 어느 질병보다 자주 드라마나 영화에 많이 등장합니다. 치료가 어렵고 급성인데다 젊은이에게 발병하기 때문이죠. 전세계적으로 치료율은 50~60%에 그칩니다. 치료비도 몇 배나 많이 듭니다. 그만큼 애처로운 병입니다." 손 교수는 인터뷰 내내 그는 '혈액의사'임을 강조했다. 마치 피를 다루는 의사로서 백혈병 치료의 사명을 띤 듯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글·사진=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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