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을 여물게 하는 가을볕에 말라 들어가는 해바라기와 초목들이 펼치는 들녘의 풍광, 푸른 물이 뚝뚝 듣는 듯 하는 깊이를 모를 하늘 빛, 발바닥에 눌리는 부드러운 붉은 흙의 감촉을 느끼며 호젓한 길을 가슴을 드러낸 채 생각에 잠겨 걸어가는 반라의 여인과 단발머리의 어린 소녀, 쓸쓸하면서도 찬란한 몽환적인 풍경이다.
시가지의 가로 풍경을 묘사하면서 수채화로 시작한 그의 양화의 세계가 불과 2. 3년 만에 리드미컬한 필치로 자신의 양식을 완성하는가 하면 이제 풍경과 인물을 결합한 새로운 구상화(상상화)를 탄생시켰다. 이 작품은 여러 가지 점에서 야심적이다. 우선 크기에서 대작일 뿐 아니라 유화로 제작했으며 주관적인 풍경화의 시작을 알린다.
지금까지의 풍경화에서 인물은 경치의 일부로 혹은 부속적으로 그려졌으나 여기서는 화면의 중심에서 이야기를 지배하는 주인공이다. 일본에 인상파를 도입한 구로다 같은 작가의 후기 작품에서 시도되었던 일본 구상화의 영향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 근대 화가들의 작품에서는 본격적으로 채택되지 않았으나 이인성은 이 그림 이후 1935년의 '경주의 산곡에서'와 36년의 '한정' 등으로 이어지면서 그의 후기 양식의 한 특징을 이룬다.
34년 봄 조선미전에서 특선을 차지한 이 그림은 33년 가을 즈음에 시작하였을 것인데 그가 일본에 머문 지 겨우 2년 정도가 지난 시점이다. 아직 유화의 기법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나 경험을 습득하기에는 충분한 기간이 아니었지만, 수채화에 의해 고양된 조형의식은 주저함이 없이 대담하게 자신의 관념을 그대로 유화로 옮기게 했다. 유화에 대한 아카데믹한 수업의 결과를 반영한 것이 아니라 수채화의 감각적인 세계에서 유화의 재료로 매체를 바꾼 것이다. 이것이 더 이상 자연주의적 시각에서 대상의 재현이나 디테일 묘사에 집착하지 않고, 조명의 일관성이나 통일적인 시점과도 무관한 대담한 구성으로 나아가게 했을 것이다.
1933년 봄, 조선미전에서 연이은 특선과 여름에는 고향에서 가진 첫 개인전, 또 가을에는 일본 제전에서 연속 입선의 영광을 안은 뒤에 얻은 자신감에서 고조된 미적 관념을 표현한 것인데 그 중심에는 여러 가지 영향과 함께 바로 향토색에 대한 생각도 들어와 있다. 그가 추구한 향토색은 가을 하늘의 푸른색과 토양의 붉은 색채다. 관념적이기는 하나 감각적이고 직관적인 반향을 일으킨다. 야취를 느끼게 하는 다소 거친 묘사와 원시적인 색채의 조화가 바로 이 그림을 이국적으로 느끼게 하면서도 그의 수채화와 같이 본능적이고 뛰어난 감수성의 표현으로 보이게 하는 이유다. 김영동(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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