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년 만에 다시 경주를 찾았다. 지난번 찾았을 때엔 봄기운이 완연했다. 겨우내 잠들었던 논둑길엔 봄꽃이 피어나고 나뭇가지엔 연둣빛 새순이 돋고 있었다. 하지만 벌판은 텅 비어 있었다. 서너 군데 모내기를 위해 논물을 대고 있었을 뿐 황량한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시간은 놀라운 일들을 해낸다. 사실 시간의 힘이 아니라 농부의 검게 탄 피부와 구슬땀이 일궈낸 결과물이지만.
어린 시절을 농촌에서 보낸 기자는 누렇게 익어가는 벼 이삭과 하루가 다르게 굵어지는 밤송이, 투명한 녹색으로 바뀌어가는 대추 알맹이를 볼 때면 묘한 흥분감에 사로잡힌다. 그저 기분이 좋아진다. 흐뭇한 미소가 입가에 번지면서 별일도 없이 그저 실실댄다. 옆에서 누군가 보고 있으면 아마 반쯤 정신 나간 얼뜨기 취급을 할 터. 초가을에 찾아간 경주는 그렇게 무르익고 있었다.
##'제망매가'와 연결된 사천왕사
한옥 펜션인 수오재(守吾齋)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이튿날 일찌감치 길을 서둘렀다. 수오재 주인 이재호 씨는 "한 시간 남짓이면 충분한 짧은 코스를 택했다"며 동행한 작가와 기자를 독려했다. 사람 마음은 참 간사하다. 반환점까지만 얼추 3시간이 걸리는 꽤나 먼 거리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진작에 맥이 풀렸을 텐데. 가벼운 마음으로 나선 덕분에 오히려 힘든 줄 모르고 내달았다.
수오재 뒤편 효공왕릉에서 길을 나섰다. 들판을 가로질러 낭산(狼山) 기슭에 당도한 뒤 사천왕사지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계속 산으로 올라가면 선덕여왕릉이 나온다. 사천왕사지는 아직도 발굴 작업이 한창이다. 사천왕사는 승려 월명사가 기거했던 사찰이다. 전해오는 신라 향가 25수 중 가장 서정적인 작품으로 알려진 '제망매가'(祭亡妹歌)를 지은 바로 그 인물.
이재호 씨는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참 때를 잘 맞춰 사천왕사에 도착했다"고 했다. 먼저 누이를 떠나보내며 그 애틋함을 담은 '제망매가'에 걸맞은 계절이 바로 지금이라면서. '삶과 죽음 갈림길/ 여기 있음에 두려워하여/ 나는 간다는 말도/ 못 다 이르고 가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에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같은 나뭇가지에 나고서도/ 가는 곳을 모르겠구나.' (후략)
시구를 읊조리며 사천왕사지를 카메라에 담는데 마침 바로 옆 벚나무에서 나뭇잎이 바람에 날린다. 경주에서 울산으로 이어지는 7번 국도의 번잡함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사천왕사지에서 신문왕릉까지는 400m가량. 신라 제31대 왕인 신문왕은 문무왕의 맏아들이다. 왕릉 중에도 제법 번듯한 면모를 갖췄다. 신문왕릉 바로 아래쪽 동네 이름은 '능마을'이다. 여기서 7번 국도를 건너면 경주 남천 둑길에 닿을 수 있다. 700여m 남짓한 이 둑길은 호젓함을 만끽할 수 있는 아주 예쁜 길이다. 가을에 걷기에 안성맞춤.
남천 둑길로 접어들어 500여m 가면 '장사 벌지지'(長沙 伐知旨)라고 쓰인 돌비석 하나를 만날 수 있다. 신라의 눌지왕 때의 충신 박제상(363~419)의 아내에 얽힌 이야기가 돌비석 뒤편에 새겨져 있다. 박제상은 고구려와 왜(일본)에 건너가 볼모로 잡혀 있던 왕의 아우들을 고국으로 탈출시키고 자신은 왜군에게 붙잡혀 유배됐다가 처참히 살해된 인물. 삼국유사에 따르면, 남편이 왜로 떠날 때 이곳 남천변 모래밭에 드러누워 오랫동안 부르짖었다 해서 '장사'(長沙)이고, 친척 두 사람이 부인을 부축해 집에 데려가려 했으나 다리를 뻗고 일어나지 않았다 해서 이 땅을 '벌지지'(伐知旨)라고 불렀단다. 남편의 운명을 알고 슬픔에 목놓아 울었던 바로 그곳이다.
##가을이 예쁜 호젓한 남천 둑길
비석을 따라 논둑으로 내려가면 논밭 사이에 소나무가 우거진 작은 섬처럼 생긴 숲이 있다. 어른 엄지손 한 마디만한 우렁이가 떼를 지어 사는 논을 지나 외나무 다리를 건너면 솔숲 사이에 '망덕사지'와 '망덕사지 당간지주'를 찾을 수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망덕사는 신문왕 5년(685)에 건립됐다고 한다. 당간은 옛날 절에서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았던 깃대이며,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해 양옆에 세운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당간지주를 지나면 절터가 나오고 동서편에 13층 목탑지가 남아있다.
망덕사는 사천왕사와 얽힌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당초 당나라 외침을 막기 위해 세운 절이 사천왕사. 하지만 당나라에는 당 황제 고종을 위한 절이라고 거짓 보고를 했다. 당나라는 이에 사신을 보내 사천왕사가 있는지 확인하려 했고, 신라 조정은 사신을 망덕사로 인도했다고 한다. 한때 신라의 운명을 짊어진 사찰이었지만 지금은 흔적만이 외롭게 남아있다. 이곳에 서면 국도 건너편에 신문왕릉과 사천왕사지가 손에 잡힐 듯 보인다.
남천 둑길을 지나 화랑교를 건너 400m쯤 가면 '경상북도산림환경연구원'과 '야생화전시장'을 만날 수 있다. 오늘 동행길의 목적지인 '서출지'까지 가는 중간 지점쯤 된다. 야생화전시장에는 1만2천㎡ 부지에 230여 종의 야생화 12만 그루가 자라고 있다. 자녀들과 함께 꼭 한번 찾아갈 만한 곳이다. 답사길에 피곤한 다리를 쉴 수도 있고, 야생화를 감상하며 목도 축일 수 있다. 입장료도 없다.
##헌강왕릉 가는 길엔 빽빽한 송림
이곳에서 다시 길을 따라 1.5㎞쯤 가면 화랑교육원을 지나 '헌강왕릉'에 닿을 수 있다. 앞서 길의 출발점이었던 효공왕릉과도 밀접한 사이다. 제52대 효공왕의 아버지가 바로 제49대 헌강왕이다. 제50대는 헌강왕의 동생인 정강왕이고, 제51대는 헌강왕의 여동생이며 신라의 마지막 여왕인 진성여왕이다. 진성여왕은 살아있으면서 왕위를 친정 조카에게 넘겨준 유일한 왕이기도 하다.
헌강왕은 동해 용왕의 아들인 처용을 서라벌로 불러들인 인물이며, 그 자신도 춤과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모양이다. '왕위에 있는 동안 태평성대를 이뤘는데 거리마다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일본 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을 바칠 정도였다'고 안내판에 적혀 있다. 헌강왕릉에 이르는 솔숲은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헤아릴 수도 없이 빽빽한 송림 사이에 서 있으면 넘치는 기(氣)가 느껴진다. 가을은 깊어가고, 길은 끝을 향한다. 하지만 천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지금도 살아 숨쉬는 신라인들을 향한 상상의 나래는 끝도 없이 펼쳐진다. 인구 100만 명이 살았다는 거대 도시 서라벌을 상상의 한쪽에 남겨둔다. 봄과 가을에 만난 경주를 겨울에도 만나고 싶다.
글'사진=김수용기자 ksy@msnet.co.kr
도움말=기행작가 이재호 054)748-1310
전시장소 협찬=대백프라자 갤러리
댓글 많은 뉴스
경북대 '반한집회'에 뒷문 진입한 한동훈…"정치 참 어렵다"
한동훈, 조기대선 실시되면 "차기 대선은 보수가 가장 이기기 쉬운 선거될 것"
유승민 "박근혜와 오해 풀고싶어…'배신자 프레임' 동의 안 해"
"尹 만세"…유인물 뿌리고 분신한 尹 대통령 지지자, 숨져
법학자들 "내란죄 불분명…국민 납득 가능한 판결문 나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