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의 화대종주(구례 화엄사~산청 대원사)는 덕유산의 육구종주, 설악산의 서북종주와 함께 우리나라 3대종주로 꼽힌다. 일반적으로 지리산 종주는 노고단~천왕봉~중산리에 이르는 33.4㎞의 주능선 산행을 말하지만 성삼재(1,080m)까지의 '무임승차'를 거부하며 일부 산꾼들이 만들어낸 코스가 화대종주다. 화엄사와 대원사를 잇는 46㎞는 지리산을 동서로 관통하며 85봉, 73골, 26능선을 '원샷원킬'로 끝내는 코스다. 동서길이만 50㎞, 남북 32㎞, 둘레만도 320㎞에 이른다. 지리산 화대종주 100리길을 2박3일 동안 돌아보았다.
◆화엄사 들머리로 100리길 장정=대구에서 버스를 타고 남원을 거쳐 구례에 도착한 시간이 정오 무렵. 화엄사 입구에서 장정의 첫발을 내딛는다. 등산로는 신우대가 터널을 만들어 상쾌했다. 산죽들이 옅은 바람에 살랑이며 청량한 울림을 만들어냈다. 때마침 정오를 알리는 화엄사의 법고 소리가 계곡을 따라 울린다. 몇 해 전 청도 운문사에서 저녁 법고의식을 관람한 적이 있었다. 여승 두 명이 석양을 비껴 서서 북을 두드리는 장면은 의례를 넘어선 감동이었다. 화엄사에서 노고단까지는 3시간 30분쯤 걸린다. 노고단 7부 능선쯤에서 복병을 만났다. 아침나절 화창하던 날씨가 갑자기 소나기로 변해버렸다. 장대비를 피해 수 백 명의 등산객들이 노고단대피소로 몰려들었다. 30분쯤 기다렸다. 어차피 대피소엔 잠자리도 없을 터, 날씨의 훼방, 비의 심술을 박차고 노고단을 나섰다.
◆현대사 이념 갈등 서린 피아골=노고단에서 반야봉 중간쯤에 임걸령이 있다. 피아골 계곡과 능선이 만나는 곳이다. 피아골 단풍은 '지리산 10경'에 들어갈 정도로 비경을 자랑한다. 이 지고(至高)의 아름다움 너머에 큰 아픔이 투영돼 있다. 현대사 이념 갈등의 유혈 충돌이 이 골짜기를 무대로 전개됐다. 사실 빨치산들이 피아골에만 숨어든 것은 아니었다. 이태가 쓴 '남부군'에 보면 산청, 함양, 거창, 백무동 곳곳에 '산사람'들의 본거지가 흩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피아골이 주목 받는 이유는 '비경'과 '살육'이라는 극적 요소의 대비 때문이기도 하다. 상념에 빠져 들기를 잠시, 사위(四圍)가 순식간에 어둠에 잠겨버렸다. 제일 가까운 연하천 산장까지 가려면 5시간은 가야한다. 헤드랜턴에 의지해 빗속을 뚫고 겨우 산장에 도착했다. 오후 9시도 채 안된 시간, 산장은 적막 속에서 고요하다. 피곤에 지친 등산객들의 코고는 소리가 어둠을 들썩인다. 눅눅한 침낭에 지친 몸을 누인다.
다음 날 아침 몰려드는 졸음과 피로를 생수 한 잔으로 몰아내고 동진(東進) 길에 나선다. 서산대사 휴정은 '지리산은 웅장하나 수려함이 떨어진다'(壯而不秀)고 표현했다. 이 통설에 이견을 제기하는 코스가 있으니 바로 벽소령에서 천왕봉에 이르는 구간이다. 종주 코스 중 경관이 가장 뛰어나며 지리산의 10대 경관 중 피아골 단풍, 벽소명월이 포함돼 있다. 특히 영신봉 모퉁이를 돌며 펼쳐지는 세석평전의 조망은 대표 경치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다. 8시간의 고투 끝에 천왕봉에 도착했다. 벌써 장딴지는 알이 배 천근만근이다. 아직도 정상엔 안개가 자욱해 정상 등정의 쾌감은 짙은 연무가 이미 거둬가 버렸다.
◆'산장지기의 고독'=이제 봉우리를 내려서면서 대원사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등산로에 북적이던 산꾼들도 천왕봉을 넘어서자마자 발길이 뚝 끊어졌다. 중봉과 하봉을 넘어 능선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3시간쯤 걸어 2박 예정지인 치밭목 산장에 도착했다. 몇몇 등산객들과 저녁을 먹으며 담소를 나눈다. 산에서 만났으니 다들 산 얘기뿐이다. 야경으로는 벽소령 명월을 최고로 친다지만 치밭목에서 바라보는 보름달의 운치도 좋았다. 산장지기는 "겨울철엔 보름 넘게 등산객이 한 명도 오지 않을 때가 많다. 일반인에게 낭만적으로 비칠 산장 생활도 알고 보면 고단한 생존과정"이라고 털어 놓았다. 오후 9시쯤 산장지기의 소등 안내와 함께 지리산에서의 두 번째 밤을 맞았다. 야생화 향기에 눈을 뜨고 새소리에 잠이 깨는 산장의 아침은 청량하다. 3, 4시간의 짧은 수면으로도 피로를 느끼지 않는 것이 산장숙박의 장점이다.
◆남한 제일의 탁족처, 대원사계곡=햇반과 통조림으로 조반을 해결하고 하산길에 오른다. 산장 바로 밑에서 낙차 큰 굉음을 자랑하는 무제치기폭포는 칠선, 한신, 불일폭포와 함께 지리산을 대표하는 폭포다. 3단으로 포말을 날려서 스스로 무지개를 만드는 폭포라 하여 이 이름을 얻었다. 이 폭포수를 따라 30리 길 대원사계곡이 이어진다. 천왕봉에서 중봉, 하봉을 거쳐 왕등제 웅석봉으로 이어지는 대원사 계곡은 유홍준 교수가 '남한 제일의 탁족처'(濯足處)로 소개하면서 유명해졌다. 산행의 종착역 대원사는 여승들이 낭랑한 독경으로 마음을 닦는 청정 비구도량이다. 사찰에는 참선에든 비구승들의 선적(禪的) 고요와 밤을 주으며 까르르 웃어대는 여승들의 동심이 한 공간에서 묘한 동거를 이루고 있다. 풍경 사이를 비추며 맑은 울림을 빚어내던 석양이 어느덧 파스텔 톤으로 물들었다. 이제 이틀 간의 '출가'를 마치고 귀갓길에 오른다. 산에 드는 것만으로 지혜롭게(智) 달라진다는(異) 지리산. 벌써 현자(賢者)라도 된 걸까. 사찰을 가로질러 세상 속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사뭇 가볍다.
글·사진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교통·숙박=대구 서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남원 가는 오전 7시 55분 시외버스를 타고 남원에 도착, 오전 10시 30분 구례행 버스로 갈아탄다. 구례 화엄사 입구에서 내려(정오쯤 도착) 화엄사 계곡을 오른다. 종주한 경우 대원사까지는 오후 5시 이전에 도착해야 대원사~진주, 진주~대구행 시외(고속)버스가 연결된다. 치밭목산장에서 오전에 출발하면 시속 2, 3㎞의 느린 걸음으로도 시간이 넉넉하므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산장 예약은 필수. 대피소 예약은 종주15일 전부터 가능하며 인터넷을 통해 이루어진다. 오전 10시에 접수가 시작되는데 지리산은 휴일이나 주말에 신청자들이 많이 몰려 수 초 만에 접수가 끝난다. http://jiri.knp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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