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운문서 화악까지] (43)청산재 청산벌 배바위산

억새벌판 청산벌을 국가가 만든 지도엔 통점령으로 오기

청산벌 모습. 가을엔 이같이 묵밭이 되나 봄채소 철엔 일대 평원 풍경이 완전히 달라진다.
청산벌 모습. 가을엔 이같이 묵밭이 되나 봄채소 철엔 일대 평원 풍경이 완전히 달라진다.

지면 한계로 먼젓번 얘기를 서둘러 마쳤으나, 백록마을 뒤 '청산' 일대는 그 정도로 살피고 마칠 수 없는 구간이다. 대구권에 중요한 지형인데도 관련 정보가 혼미한 채 방치돼 있기 때문이다.

그 구간 비슬기맥 흐름부터 다시 보자면, 북진하는 산줄기는 802m봉서 781m 잘록이를 건너 794m봉으로 올라섰다가 직각 좌회전해 704m재로 내려선다. 794m봉이 주목할 산줄기 방향 전환점이라는 뜻이다. 대부분 등산객들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일이다. 781m 잘록이서 704m재로 바로 내려서느라 그걸 빼먹는 탓이다. 하지만 기맥은 분명 저런 노정을 거치고서야 730m구릉으로 상승해 본격 서행(西行) 길에 나선다.

이렇게 구성된 일대 산덩이는 '청산' '청령산' '청룡산' '천등산' '취(최)경산' '취(최)정산' 등 여러 가지로 혼란스레 지칭됐다. 남지장사 뒤로 갈라져 가는 지릉까지 합쳐 그럴 때도 있었다. 그러면서 대개들 그 여러 이름이 '최정산' 혹은 '최경산'의 변음일 것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최정산 최고봉은 거기서 4.5㎞나 떨어져 있는데도 그랬다.

최정산은 익히 아는 알려진 이름이지만, '최경산'(최瓊山)이라는 이름 또한 1940년쯤 씌어졌다는 '청도문헌고'에 선명히 등장한다. 군의 북쪽 60리에 있으며, 맥이 삼성산서 뻗어 나와 이걸 거친 후 삼봉현(헐티재를 잘못 지칭)으로 이어간다고 설명돼 있는 것이다. 팔조령~자양산(군북30리)~삼성산(군북30리)~최경산(군북60리)~삼봉현(군서60리)~비슬산(군서60리) 순으로 이어진다는 얘기다.

'청산' 다음으로 혼란 심한 명칭은 '통점령'이란 것이다. 국가기본도는 794m봉에다 그 명패를 붙여 놨고, 현지에선 781m 잘록이에 '통점령'이란 팻말이 세워져 있다. 산등성이가 통점령인 듯 생각게 만드는 자료들이다. 그 북서편으로 넓은 평원이 펼쳐져 대관령 같은 느낌이 들어 그랬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주변 마을 어르신들은 '통점령'이란 이름을 들은 바 없다고 했다. 해발 700~750m 사이의 그 평원에는 '청산벌'이라는 별도의 이름이 있다고 했다. '청산에 있는 평원'이라는 뜻이다. 그러면서 저 청산에서 바라다보이는 것은 '바깥 청산벌', 더 북편 접근 통제 지역 것은 '청산 안벌'로 구분해 부른다고 했다. 현지인들도 모르는 '통점령'이 국가기본도에 버젓이 등재돼 있다는 뜻이다. 어쩌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의문은 1918년 일제가 처음 완성한 한반도 등고선 지도를 보고서야 풀 수 있었다. 문제의 통점령이 특정 지형의 이름으로 거기에 명쾌히 표시돼 등장하기 때문이었다. 일본제국 지도가 콕 집어 통점령이라 표시해 놓은 곳은 704m 잘록이였다. 대한민국 지도가 가리킨 794m봉이나 현지표지판이 서 있는 781m 잘록이가 아니었다. 그러면서 그 남쪽 기슭 지슬리 못 안 골짜기에 '통점'이란 자연마을이 있다고도 표시해 놨다. '통점마을로 가는 고개', 즉 남쪽의 청도 지슬리 통점마을과 북쪽의 달성 주리를 잇는 재가 '통점령'이었던 것이다.

이 자료를 확인한 뒤 어르신들께 '통점마을은 아시느냐'고 다시 물었더니 많은 분들이 금방 소상히 기억해 냈다. 너덧 집 되던 그 마을에 살던 사람들까지 잘 안다고 했다. 그 마을 위의 재도 그랬다. 옛날 지슬리 쪽 사람들이 대구로 나들던 매우 중요한 길목이라 했다. 대구에 유학했던 70대 전후 세대도 대개 그 재를 넘어 주말 집에 다녀가곤 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재를 통점령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지슬리 어르신들은 '청산재'라 하고 주리 어르신은 '치실재'(지슬재)라 했을 뿐이다. 일제가 처음 지형도를 만들면서 임의로 지어 붙인 이름일 가능성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현장 상황이 이런데도 우리 손으로 만든 국가기본도는 재도 아닌 엉뚱한 봉우리에 통점령이라 표시해 뒀으니 기가 막힌다. 그 마을이 있던 골짜기는 1:5,000 지형도를 통해 지금도 '통점골'이라 표시하면서 통점령이 어디인지는 찾아볼 생각을 않았다는 말이니 더 한심스럽다. 침략국 일본제국이 가리킬 수 있었던 통점령 자리를 광복한 대한민국은 왜 몰랐을까? 이렇게 곡절 많은 청산재는 세월 따라 묵어 풀숲에 묻혔으나 워낙 깊게 패어 길바닥 흔적만은 여전히 선명하다.

저 '청산재'서 올라서면 730m봉이다. 거기서는 가창의 지형을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산줄기가 북으로 갈라져 나간다. 최정산(最頂山)-주암산(舟岩山) 능선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능선은 초기 흐름이 워낙 희미해 분별이 잘 안 될 정도다. 출발점인 730m봉조차 무심코 지나치기 십상이다. 그 이후 산줄기가 1.3㎞나 이어가면서 보여주는 높이 변화 또한 겨우 722m 저점으로 조금 내려섰다가 744m 구릉(국가시설 터)을 거쳐 740m 잘록이(최정산 자동차도로가 처음 능선 위에 도달하는 지점)로 내려앉는 정도다. 높은 산 위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일대가 극히 평평하다는 뜻이다. 거기 펼쳐진 게 바로 '청산벌'이다.

최정산 능선은 저 구간을 넘어서서야 880m 이상의 높이로 급등하고, 805m 잘록이서 잠깐 주춤거린 후 최고점인 905m봉까지 솟는다. 그 남서쪽 '소매골' 계곡에는 '평지말' '한덤이마을' '배정마을'(이상 정대1리), 북서쪽 계곡에는 구삼마을(오리), 북편에는 운흥사 및 음지마을(오리), 동편에는 안주리마을(주리) 등 가창면 마을들이 분포했다.

저렇게 솟구친 최정산능선은 내친김에 위세를 더 멀리까지 떨쳐 간다. 905m봉에서 멈추는 게 아니라 동쪽으로 더 뻗어 '배바위산' 권역까지 형성하는 것이다. 남쪽에 가창면 주리, 동편에 대일리·냉천리 등이 자리 잡은 게 저 산덩이다. 위세가 대단해서 더 동편 단산리 쪽에선 어떤 산보다 뚜렷이 바라다보이기도 한다.

그 상징물인 '배바위'는 대일리 북서쪽 골 끝 냉천리와의 경계점에 솟은 해발 846m짜리 암괴다. 산에서 그렇게 덩그러니 놓인 덩치 큰 바위덩어리는 어디 없이 '배바위'라 불리기 일쑤다. 그래서 '배바위'는 이 산에도 있고 저 산에도 있으며, 이 골에도 보이고 저 골에서도 나타난다.

이 산 배바위는 그야말로 주변 세상이 다 보이는 명소다. 주위에는 다른 특출한 벼랑바위들까지 여럿 있다. 갓을 쓴 모양새라는 '갓쓴바위', 그 위에 한 몸처럼 솟아 보이면서 석이버섯이 많이 났다는 '석이바위'(혹은 '山자 바위'), 그 동편 산줄기 위의 '수리덤'과 '부채바위' 등등이 대표적이다. 그 자락의 '바곡재'(379m)도 많은 이들의 추억이 쌓인 고개라 했다. 주리 마을의 대구 관문이었고, 그 마을 아이들이 가창 최고(最古)의 대일리 초등학교로 통학하던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정산이나 배바위산을 두고는 지도들의 지형·지명 표기에 혼란이 심하다. 1:25,000 및 1:50,000 지형도 경우 최정산 최고봉 높이는커녕 위치조차 나타내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서 더 북편 881m 수준점에 '최정산'이라 표시해 혼란을 부른다. 배바위산은 국가기본도 종류에 따라 그 주봉을 다르게 지목한다. 1대5,000 지형도는 삼각점이 있는 847m봉에 '단암산'(丹岩山)이라 오기(誤記)해놓은 반면, 1:25,000 지형도는 그 남쪽 855m봉에 '주암산', 1:50,000 지도는 그 중간에 '주암산'이라 써넣어 뒀다.

지형도들이 이름을 한자로 번역해 '舟岩山'(주암산)이라 표기하는 것 또한 께름칙하다. 좋은 우리말 본명을 두고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舟(주)-船(선)-艦(함) 등 배를 가리키는 여러 한자 중 왜 하필 舟여야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일제 냄새가 짙다는 뜻이다. 본명을 되살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뿐만 아니라 일대 구성으로 볼 때, 배바위산을 분리해 별개의 산으로 구분하는 것도 적절치 못해 보인다. 청도-창녕-밀양 경계에 있는 천왕산 옆구리의 배바위 부분을 떼어내 '배바위산'이라 부르는 것만큼이나 어색하다. 최정산의 일부로 편입시키면서 846m 암봉만 '배바위'라 표기하는 게 좋을 듯하다.

앞서도 봤듯 최정산능선 분기점 730m봉은 드넓은 청산벌의 평범한 구릉 중 하나로 보일 뿐이다. 산 눈 어두운 사람들에겐 거길 거쳐 다음 구간으로 흐름을 더듬어 나가기가 버거울 정도다. 최정산 가는 방향 잡기도 그렇지만 비슬기맥 좇아가기는 더욱 그렇다. 최정산 능선은 그나마 점차 상승하니 다행이지만, 기맥은 갈수록 고도를 낮춤으로써 다음 지향점조차 안 보여주기 때문이다.

청산벌 억새벌판을 벗어나는 지점은 730m봉 서쪽의 또 다른 704m 잘록이다. 그 지점 이후 구간에선 초봄에 노란 꽃이 무리를 이뤄 핀다. 등산객들이 군락지 끝머리 713m구릉에 배낭을 내려놓고 한숨 돌리는 것은, 청산벌 억새숲에서 다행히 길을 잘 찾아 나왔다는 안도감이나 복수초(福壽草)일 듯싶은 저 봄꽃 때문일 수 있다.

글 박종봉 편집위원

사진 정우용 특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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