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말, 서울에서 천안으로 가는 열차를 탔다. 첫사랑 연인을 만나러 가듯 마음이 풍선처럼 붕붕 부풀어 올랐다. 가을빛으로 무르익은 안양을 지나 군포에 닿았을 때 설레는 가슴을 꾹꾹 누르며 근처 꽃집으로 갔다. 금천죽을 고르고 '선생님, 감사합니다!'라는 꼬리표를 달았다. 화분을 아이처럼 끌어안고 낮달이 교문을 열어주는 K중학교에 발을 들여놓으니 마음이 초가집 모서리처럼 둥글어졌다. 내 이름으로 된 시집을 들고 찾아뵐 수 있도록 만들어 준 그분이 몇 미터 앞에 계신다고 생각하니 주체할 수 없는 뜨거운 것이 울컥 올라왔다.
고등학교 때 '아침'이란 시제로 교내 백일장을 했는데 백일장 심사를 한 선생님이 나를 교무실로 불렀다. 그 시기에 나는 사춘기를 심하게 앓았고, 내가 누구인지 존재의 본질에 대한 정체성을 찾지 못해 많이 힘들어 했다. 선생님이 마실 우유를 나에게 한 잔 내 놓으며 "상상력과 어휘력이 대단하구나! 아직 완벽한 건 아니지만 생전 처음 밝아오는 아침처럼 아주 싱싱해. 그 싹을 잘라버리지 말고 잘 키워보거라"며 격려를 해 준 선생님의 따뜻한 말씀이 캄캄한 바다에서 등대를 만난 듯 반가웠다. 내겐 엄청난 위력으로 다가왔었다. 올해 교장 선생님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주며 "네가 시집이 나오면 함께 축하하며 식사라도 한 끼 하자"고 했다.
말에는 분명 힘이 있다. 우리는 말로 다른 사람을 위로해 줄 수도 있고 책망할 수도 있으며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 불만과 절망의 말은 세상을 추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꿈과 희망의 말은 세상을 활기차게 만든다. 세상이 온통 근심걱정으로 가득 찬 것처럼 보인다. 정말 세상이 이렇게 어려운 것일까.
오늘은 시내 모 공업고등학교에 특강을 하러 간다. 내가 사춘기를 앓던 그 또래의 아이들에게 지난날 국어 선생님의 따뜻함을 전달할 수 있는 희망 전도사가 되려면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걱정이 앞선다. 옛시조에서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라고 했지만 생각을 바꿔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말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욕을 많이 먹으면 오래 산다'는 속담은 근래에 들어서 그렇게 유효한 말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내가 해준 말 한마디 때문에, 내가 베푼 작은 친절 때문에, 내가 감사한 작은 일들 때문에, 누군가 행복할 수 있다면 우리는 살아갈 의미가 있다. 결국 세상은 보는 눈과 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친구와 사소한 문제로 다툴 때도 있고 때로는 예상치 못했던 큰 일이 닥쳐 막막할 때도 있다. 따뜻한 말 한마디로 인해 누군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놀라운 축복일까.
서 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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