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성의 1932년 이후 작품에는 보나르나 또는 고갱과 세잔 같은 후기인상파들의 양식이 차례로 보인다. 식물 넝쿨의 풍부한 묘사로 가득 찬 화면에서 느껴지는 보나르적인 구성은 일본 작가들의 영향이 분명하고, '가을 어느 날'에서 보인 고갱 풍의 이국적인 요소나 좀 더 후기의 정물과 인물화에서 경도된 세잔 형식은 도판을 통한 참조였을 것이다. 그는 순전히 감각에 의존해서 이런 서양의 그림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기량에 힘입어 외래의 양식을 발전시킨 때문에 색채와 형태의 구성이 자유롭고 자발적인 터치가 지배하는 활달한 화면을 구축할 수 있었다. 오히려 후반에 가서 아카데믹한 태도로 추구한 작품들에서는 그의 개성인 특유의 즉흥성이 빛이 바랜 듯해 아쉬운 측면이 있다.
1935년 조선 미전에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은 이 작품 역시 전 해에 그린 '가을 어느 날'에 이어 유화로 제작한 구상화이다. 하늘과 대지에 대한 원색적인 파악이 강렬한 인상을 주면서 고도(古都)의 상징적인 이미지들이 풍경과 함께 선택되어 경주라는 역사적 고장에 대한 관념을 환기시킨다. 낮게 펼쳐지는 구릉들과 첨성대의 어렴풋한 원경, 괭이자루인 듯 보이는 것을 손에 쥔 소년 앞에 놓인 와당 파편이 크게 강조된 것에서 주제와 장소성이 동시에 확인된다.
지금까지 그의 소재 채택 경향을 보면 모던하고 세련된 도시 생활이거나 도시인의 감수성에 비친 자연이었다. 신식 건물이라든지 공원 주위, 잘 가꾸어진 집안의 뜰이나 거실의 풍경이 주를 이루었는데 30년대 중반에 이르러 의식하기 시작한 향토에 대한 이념은 그림에 회상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서정주의를 짙게 배게 했다. 특히 가을 하늘과 토양의 색채를 통해 강하게 표방한 향토성이 이번에는 고도에서 출토된 유물로 시선을 향한다. 그러나 이렇듯 새롭게 주목되는 낭만주의적 주제마저도 이 작품의 강렬한 표현성은 그의 미학적 열정에 용해시켜 버린다.
관념적인 주제, 주관적인 구성 외에도 이제까지의 그림들과 다른 점은 수목의 표현에서 그의 패턴적인 표현이 뚜렷해진 것이다. 특히 왼쪽의 수직으로 솟은 소나무나 군데군데 작은 식물의 형태에서도 패턴적인 표현이 두드러진다. 아이 업은 소년의 형상이나 앉은 인물은 손발의 디테일 묘사가 정교하지 않지만 두상과 얼굴의 표정에서 역시 독특한 개성이 나타난다. 아카데믹한 재연을 벗어난 하나하나의 묘사는 표현의 대담성이 있고 복잡한 듯 보이지만 평면적인 구성은 자유로우면서도 장관이다. 스물넷의 이인성이 그린 최고의 야심작이었다.
김영동(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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