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 단밀면 낙정2리 낙정마을은 20세기 초반까지 나루와 역(驛)을 통한 물류와 교통의 중심지였다. 6'25때 인민군 공치(共治)의 아픔을 겪은 뒤 낙단교 건설과 함께 근대화의 물결을 탔다. 낙동강변의 잦은 침수와 범람은 현재의 상가지구를 형성하는 계기가 됐다. 80년대 중반 낙단교 건설과 강 둔치 개발이 편리한 교통과 풍요로운 땅을 가져다 주었던 것.
낙정의 옛 누각인 관수루는 고려시대 이후 지금까지 이 같은 낙정의 굴곡과 역사를 담아냈고, 시어머니와 며느리 고부지간을 모신 마을 당집은 낙정의 어제와 오늘, 내일을 지켜주고 있다.
◆인민군 공치의 흔적
낙정은 낙동강을 낀 마을 가운데 6'25전쟁 당시 인민군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마을사람 대다수는 전쟁 소식을 제대로 듣지 못한 바람에 인민군이 마을로 들어오면서 급하게 피란을 떠났다. 그렇다보니 제대로 도망가지 못한 채 마을 동북쪽 뒷산인 만경산 기슭 '넙덕바위'를 피란처로 삼았다.
구양호(68) 씨는 "아버지와 형님들과 함께 소등에 질매(멍에)를 얹고 그 위에 나락(쌀) 한 가마니, 옷가지 몇 개, 귀중품을 담아 피란을 떠났는데, 이미 전투가 시작돼 멀리 가지 못하고 넙덕바위에 마을 사람들이 모였다"고 말했다.
넙덕바위 주변은 많은 사람을 수용할 만큼 터가 넓고 평평해 주민들은 그 곳에 움막을 짓고, 바위 앞으로 흐르는 개울에 밥을 해 먹으며 피란생활을 했다고 한다.
김순분(82) 씨는 "넙덕바위에 포장 쳐 놓고, (미군) 정찰기 돌마 마구 옷 흔들고 이러면 이제 돌아가요. 넙덕바위에 숨어 댕기다가 낮으로는 파놓은 굴에 들어앉았고, 밤으로는 좀 나와 보고 이래요"라고 했다.
마을사람들은 인민군들이 들어온 지 한 달이 조금 못 되는 7월쯤 '이제는 해방이 되었으니 다시 들어와 살라'는 인민군들의 말에 마을로 되돌아왔다고 한다.
인민군들은 주민 중 유지들만 뽑아 인민위원장, 자위대장, 토지분배위원장 등 직책을 주고, 거부하면 총으로 위협하는 방식으로 마을 공치를 시작했다고 주민들은 설명했다. 인민군 공치는 국군이 밀고 올라와 두 달 만인 9월에 끝났다. 하지만 국군 선발대가 마을에 들어오면서 공치 아래에서 직책을 맡았던 사람들은 총살됐다.
정종철(79) 씨는 "인민위원장 했던 안선오, 토지분배위원장 신하규, 자위대장 했던 김재덕, 그리고 여자 한 명 그래 너인가(네 명인가) 죽었다"며 "아군 선발대 올라올 때 며칠만 비켰으면 되는데, 이 사람들이 양심적으로 자수하면 산다고 자수했거든. 그래 붙들리 가지고 전부 죽었지"라고 말했다.
노병두(79) 씨는 "우리 행님도 맹 고인이지만, 그때 인민군 자위대장 안 했는가. 아군들 올라 올 적에 아군 따라서 노무자로 갔어. 그 뒤에 아군 선발대가 집으로 찾아와 행님 이름 부르는데, 내가 아군 따라 갔다고 그랬지. 그래가 목숨 살렸다 아니가"라고 했다.
낙동에서 낙정으로 넘어오던 인민군 1개 사단가량도 강에서 떼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인민군은 당시 낙동강에서 흐르던 샛강을 건넌 뒤 다시 본류(원강)를 건너 낙정으로 넘어오기 전 하중도(河中島)에 모였는데, 그 곳에서 잠복하던 아군들의 총격과 미군 비행기 폭격에 전멸했다는 것.
김순분 씨는 "강물이 벌거이 했었는데 피가, 아휴, 인민군이 총 맞아 죽었으이께 물이 벌겋지 뭐. 해골 이런 게 있어. 강 건너가는 모래사장에서 인민군 해골과 다리뼈도 봤는데…"라고 당시를 기억했다.
마을 곳곳에는 60년 전 인민군들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현재 폐교가 된 소강초교(낙정분교)는 당시 다친 인민군들이 임시로 묵었던 임시 수용소 겸 야전병원으로 사용됐다. 또 정미소 옆 창고는 당시 인민군들이 쌀과 먹을거리를 보관하고 공급했던 보급 창고였다. 인민군들이 급하게 후퇴하면서 남긴 총탄과 탱크 3대도 전쟁이 끝난 뒤 한동안 마을에 남아 있었다. 구양호 씨는 인민군이 소를 잡을 때 쓰던 큰 칼을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노병두 씨는 "인민군들이 남긴 실탄에서 탄을 빼낸 뒤 화약을 넣어 고기를 잡곤 했다"며 "또 학교(낙정분교) 포플러나무 밑에 1대, 마을 도랑가에 인민군 탱크 2대가 있었는데, 거기는 아이들의 놀이터였다"고 말했다.
◆침수와 이주, 그리고 둔치 개발
낙단교가 의성 낙정과 상주 낙동을 잇기 전 마을 앞 낙동강은 하중도가 원강과 샛강으로 나뉘었다. 낙정 앞이 본류였고, 낙동 쪽은 사람들이 건너다닐 수 있는 여울 정도였다는 것. 그런데 80년대 중반 낙동강 범람을 막고 땅도 확보하기 위해 낙정마을 앞 강 중앙에 제방을 쌓으면서 물길은 바뀌었다. 당시 제방을 쌓기 전 강변 아래쪽에 11가구가 살았는데, 강과 인접한 바람에 침수피해를 입기 일쑤였다. 1년에 두세 번씩 물난리를 피해 이삿짐을 쌌다는 것.
노영호(71) 씨는 "1년에 한 번 정도 물에 잠기면 운이 좋은 해였고, 11가구 지붕이 모두 물에 잠기고 마을 깊숙한 옛 술도가와 도로까지 물이 넘쳐 마당에 배가 떠다닌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1985년 낙단교 건설에 들어간 정부는 다리를 놓고 제방을 쌓으면서 11가구에 대한 이주를 추진했다. 이주지 주거환경 문제로 진척을 보이지 않던 이 사업은 대통령이 마을을 방문한다는 소식에 급작스레 진척을 보였다. 5개월 만에 산을 하나 깎고 도로를 내는 등 공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급하게 이주를 진행하다 보니 이주민들은 뼈대만 세운 집에서 상수도 시설이 없어 소방차에서 물을 날랐고, 구덩이를 파고 판자를 얹은 화장실을 이용해야 했다. 이주민들은 열악한 주거환경과 보상에 대한 끈질긴 요구 끝에 결국 산을 깎은 이주지를 상가지구로 개발하는 데 군청과 합의했다. 급하게 진행된 공사는 부작용도 불렀다. 산을 도로로 만드느라 바위에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해 폭파시키는 과정에서 깨진 돌이 강안으로 들어가 물고기 집들을 모두 메워 버렸던 것.
조용호(56) 씨는 "마을에서 5명이 물고기를 잡아 팔거나 식당을 운영하며 생계를 이었는데, 다리 놓고 난 뒤 고기가 잡히지 않아 전업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제방 축조는 둔치 간척을 통한 농지 확보로 연결됐다. 한봉금(82) 씨 댁은 군에 하천부지 사용료를 지급한 뒤 개간을 통해 확보한 논이 1만7천㎡(약 5천 평)에 달했고, 윤옥선(75) 씨 댁도 하천부지 상당부분을 개간해 지금까지 농사를 짓고 있다.
한 씨는 "우리 시아버지하고 윤 씨 시아버지가 모래 자루에 버드나무를 담아가 숨(심)어가지고 자꾸 흙이 들어앉으면 이게 돋우어지는 거라"라고 말했다.
제방 바깥쪽 옛 물길에 버드나무 등을 심은 뒤 물이 빠지고 나면 뿌리가 엉키고, 여기에 흙이 쌓이면서 하천부지는 자연스럽게 논이 됐다는 것.
낙동강변에 자리한 관수루는 뒤쪽으로 인민군 공치의 흔적과 강 둔치 개발의 역사를 업고, 앞 쪽으로 옛 나루터와 배의 추억부터 낙단교와 낙단보 건설의 현장까지 지켜봐 오고 있다.
★고려 때는 낙동…200년 전 좋은 우물 생겨 '낙정(洛井)'으로 불려
단밀면 낙정은 행정구역은 의성이지만, 생활권은 상주 중심이다.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상주 문소군 속현으로 단밀면이 됐고, 고려 현종 때 상주목 문소군 속현, 고려 말 단밀현, 1907년 비안군으로 편입됐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낙정마을을 포함한 9개 동이 의성군 단밀면으로 개칭됐다. 상주 낙동면 낙동리 낙동마을과는 강을 사이에 두고 있다. 낙단교를 통해 5~10분 거리로, 결혼'장례 등 집안 대소사를 함께 나누고 교류해 왔다.
1400년대 초 윤관(尹管)이란 사람이 낙정마을을 개척했다고 하지만, '고려사'에 나타난 낙동역(落東驛)이 이 마을이란 점을 감안할 때 마을 연혁은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낙동강의 동쪽에 있다고 '낙동'이라 했는데, 약 200년 전 이 마을에 좋은 우물이 생겨나 '낙정(洛井)'으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예부터 역마와 마차, 나루터를 통한 교통과 물류의 중심지였고, 역마을 특성상 성씨도 다양하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공동기획: (주)매일신문사· (사)인문사회연구소
◇마을조사팀 ▷작가 권상구'조진희 ▷사진 박민우 ▷지도 이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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