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소(萬人疏)는 문자 그대로 조선시대 1만여 명의 유생(儒生)들이 조정의 잘못된 시책에 집단 연명해 올린 소(疏)를 말한다. 만인소는 특히 영남의 유림이 올린 것이 많았다. 최초의 만인소도 정조 때인 1792년 영남 유생 1만 57명이 올린 사도세자의 신원(伸寃)을 위한 것이었다.
이 같은 만인소에는 안동을 중심으로 한 영남 남인들의 정치적인 꿈과 좌절이 담겨 있기도 했다. 퇴계의 학맥을 계승했던 영남 남인들은 숙종조의 잇단 환국에 따른 진퇴와 영조 연간의 정치적인 위축을 겪었으나, 정조의 즉위와 함께 중앙 정계로 복귀하기 위한 희망을 품게 되었다. 이때 나온 것이 사도세자의 신원을 주장한 만인소였다. 그러나 정조의 갑작스런 사망과 노론 벽파의 일대 반격으로 남인들은 돌이킬 수 없는 정치적 소외의 길을 걷게 된다.
유명한 만인소는 고종 때인 1881년 정부의 개화 정책을 반대한 유생들이 올린 것이다. 퇴계의 후손인 이만손이 소두(疏頭)가 되어 안동'상주 등의 영남 유림이 만인소를 올려 조정의 개화 정책과 개화파를 비난한 것이다. 이름하여 영남만인소다.
영남 유림의 만인소에는 빛과 그늘이 공존하고 있다. 대의와 명분을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선비의 기개는 국운이 위태로워질 때마다 의병 운동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을 예견하고 이에 대응하는 새로운 논리를 이끌어내지 못한 점이 천추의 한으로 남는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전통질서를 옹호하다 나라가 망하고 나서야 대세에 눈을 뜨고 국권 회복에 팔 걷고 나선 것이다.
만인소가 130년 만에 안동에서 부활했다. 안동시민 1만 93명의 서명을 담은 만인소의 청와대 봉소 의례가 언론을 통해 온 국민의 시선을 모았다. 그 요지 또한 '퇴계의 교육 전통을 계승하고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로서 토대를 다지려 한다'는 안동인들의 소망을 담았다.
마땅한 일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웅도 경북으로 거듭나기 위한 신도청 시대를 앞두고 나온 만인소였으니 영남인들의 정신적'경제적인 염원을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했어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철거 위기에 내몰리고 있는 중국 상해임시정부 청사를 독립운동의 성지인 안동으로 이전하자는 내용이나, 밀양 신공항 유치 문제에 대한 언급 등이 그것이다.
조향래 북부본부장 bulsaj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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