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부지런히 가을을 실어 나르고 있다. 아직도 발걸음을 도심에만 가두고 있다면 구속하던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야외로 떠나 보자. 계절은 한시적이고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가을은 즐기는 자의 몫. 가을을 대표하는 경치로는 억새와 단풍이 단연 으뜸. 현란한 색조로 치장한 단풍이 도회지의 '성장(盛裝)미인' 이라면 무명저고리에 매죽잠(梅竹簪)하나 질러 꽂은 억새는 시골의 '자연미인'에 비유된다. 단풍에 물들까, 억새에 잠길까. 선택은 자유다. 가을을 찾아서 떠나는 여행, 이번 주는 정선 민둥산에 다녀왔다. 신불산, 재약산 함께 전국 억새 5대 명산에 랭크된 민둥산의 가을 속으로 들어가 보자.
천성산에 이어 신불'간월산까지 지역의 억새 산을 일순(一巡)하고 강원도의 억새명산을 찾아 북상(北上)길에 나선다. 한 산악회에 민둥산 행 좌석을 예약했다. 이 산악회의 산행 테마가 재밌다. '행복한 느림보 산행'. 정상정복, 인증샷, 속도전을 외치는 산행문화 속에 모처럼 슬로템포의 출현이 반갑다.
버스는 중앙고속도를 3시간 반을 달려 민둥산 억새축제장에 도착했다. 지난 10월 초부터 시작된 단풍은 산 아래까지 원색물결로 채색해 버렸다. 산길은 완만했고, 침엽수와 활엽수가 조화를 이룬 등산로는 쾌적했다.
# 매년 수십만 명 관광객 불러 모아
민둥산의 민둥은 말 그대로 '나무가 없는 벌거벗은 산'의 의미. 이런 개성 없는 산이 어떻게 등산객을 연간 40만 명씩 불러 모을까. 억새의 매력만으로 가능할까? 호기심에 마음이 급해진다.
8부 능선에 이르니 멀리서 은빛 물결이 일행을 맞는다. 발구덕에서부터 완만한 능선을 따라 길게 펼쳐진 억새밭은 '순백의 물감'으로 터치한 한 폭의 수채화. 코발트색 하늘을 머리에 이고 하얀 꽃술로 일렁이는 풍경은 말 그대로 '가을 판타지'다. 등산객들도 굽이를 돌때마다 펼쳐지는 하얀 군무에 핸드폰을 들이대며 가을을 우겨 넣기에 바쁘다. 바람이 실어온 수줍은 속삭임에 빠져들 사이, 갑자기 정선선 열차의 기적이 가을 상념을 빼앗아 달아난다.
민둥산 억새능선 면적은 66만㎡로 중급(中級) 규모. 그러나 길이만큼은 웬만한 산에 뒤지지 않는다. 남북으로 이어지는 10리 길 억새 능선은 참빗으로 곱게 빗은 여인의 가르마를 연상케 한다.
비경은 기록본능을 자극한다. 사진작가들은 석양 억새를 작품소재의 최고 중 하나로 친다. 일출, 일몰 시간을 전후한 30분은 '매직아워'라고 부를 정도로 화재(畵材)의 변화가 무쌍하다. 태양의 각과 노출에 따라 역광, 측광 등 다양한 기법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 억새밭은 사진작가들의 훌륭한 작업장
해의 각(角)을 따라, 바람의 방향을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풍경을 잡기 위해 셔터를 누르는 손길이 분주하다. 사진에서 역광을 피하는 것은 제1수칙이지만 억새밭만큼은 예외다. 억새는 빛을 머금는 집광(集光)특성이 있어 역광으로 잡아도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을 쉽게 표현할 수 있다.
이런 경치와 명성들이 산의 가치를 키웠다. 민둥산에 '제3회 풀꽃상'을 내렸던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은 '해마다 이 땅의 산과 들에 가을빛을 뿌려온 억새에 이 상을 드린다'며 시상 사유를 적어 놓았다.
민둥산의 또 하나의 장점은 사방으로 탁 트인 조망. 동에서 북으로 흐르는 스카이라인을 따라 함백산, 가리왕산, 청옥산, 두위봉, 백운산, 석병산 노추산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정선군은 정상 곳곳엔 나무 데크를 설치해 조망과 식사의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강원도의 유명한 옥수수 막걸리를 반주삼아 점심식사를 마치고 하산 길로 나선다. 행락 물결을 빠져나와 지억산~산내약수터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한결 한산해진 발걸음, 인파 속에서 흐트러졌던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계절 정취 속으로 빠져든다. 이제야 억새의 솜털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일행은 억새에 빼앗겼던 정담을 다시 이어간다.
삼내약수 표지판이 나오면 왼쪽 숲길로 접어든다. 하늘을 찌를 듯한 침엽수림이 일행을 맞는다. 청량한 숲 기운이 폐부 깊숙이 스며든다.
# 하산길엔 울창한 숲에서 산소샤워
삼내약수로 이어지는 길은 민둥산이 준비한 또 하나의 이벤트. 하산 길엔 낙엽송, 소나무, 울창한 활엽수림이 10리에 걸쳐 연결된다. 인파에 먼지에 시달렸던 등산객들은 '산소샤워' 로 피로를 푼다. 하루 종일 25리 길을 걷느라 쌓인 갈증은 삼내약수에서 달랜다. 톡 쏘는 맛과 붉게 산화된 물색이 청송달기약수와 흡사하지만 특유의 역한 맛은 좀 덜하다.
약수터에서 올려다 본 지억산~민둥산 능선이 노을 속에서 실루엣으로 펼쳐져 있다. 정상에서 석양에 물들었을 주홍빛 군무는 마음 속으로만 새긴다. 억새처럼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식물도 드물다. 혹자는 은빛 군무 속에서 낭만과 서정과 추억을 말하고, 누구는 굽히지만 꺾이진 않는 유연함에서 강인한 생명력의 교훈을 이끌어낸다. 어떤 이는 제 몸을 비벼서 울리는 스산한 공명(共鳴)에서 하얀 꽃상여의 우울을 추상하기도 한다.
사실 우리가 웃고 떠들고 오른 민둥산 억새밭은 알고 보면 민중의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다. 빈곤에 내몰린 유랑민들이 몇 되 곡식을 위한 화전 터였고 춘궁기 때 굶주린 농민들이 몇 줌 산나물을 위해 관목을 태우던 땀과 눈물의 현장인 것이다. 그 사실(史實)과 무관하게 산위엔 원색의 등산복 물결과 그들이 뿌린 유희만이 가득하다, 그 웃음 뒤에 생존을 위해 거친 손을 놀리던 민중들의 한숨까지 되짚어 보기에는 억새가 너무 아름답다.
◆맛집
- 곤드레정식:국향(033-563-9967)
- 설렁탕:해돋이휴게소(033-591-1877)
- 곤드레밥'삼나무초벌구이:구이마을
(033-592-9230)
- 황기백숙:산골토종닭집(033-591-5007)
- 감자붕생이:아라리촌주막(033-563-0050)
◆숙박
- 하늘바람(033-592-5235)
:www.skywind.co.kr
- 억새풀민박(033-592-3308)
:www.jsest.com
- 흙과소나무펜션(033-591-1159)
:www.sonamupension.com
- 락있수다 펜션(010-9081-9387'평일 할인)
:www.rockitsuda.com
- 황토참숯민박(033-562-7484)
◆교통
중앙고속도 제천IC에서 태백방면 38번 국도를 타고 증산에서 빠져나와 증산마을입구에 주차한 후 증산초교 왼쪽을 들머리로.
글'사진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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