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색 완연한 10월의 마지막 밤이다. 1970, 80년대 젊은 시절을 보낸 중년들에게 10월의 마지막 밤은 특별하다. 라디오에서 어김없이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흘러나오면 낙엽처럼 가버린 청춘과 가물가물 기억의 끝자락에 남아 있는 첫사랑에 대한 추억이 아련히 떠오른다.
'잊혀진 계절'이 10월의 마지막 밤을 특별하게 만드는 존재라면 색소폰은 중년의 가을을 특별하게 만드는 존재다. 색소폰 선율은 가을을 닮았다. 마음을 파고드는 짙은 호소력은 갈색톤 가득한 만추의 계절을 연상시킨다. 특히 중년들에게 가을 색소폰 소리는 마음의 울림처럼 다가온다. 길을 가다 우연히 색소폰 소리라도 들리면 가슴에 묻어 두었던 감성이 스멀스멀 피어난다. 중년에 가을은 계절에 취하고 진한 색소폰 선율에 취하는 시기다.
◆색소폰, 중년을 사로잡다
중년들의 색소폰 배우기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현재 아마추어 색소폰 인구는 줄잡아 30만 명 선. 지난달 11일 경기도 성남시 성남아트센터에서는 아마추어 색소폰 연주자 430여 명이 모여 '아리랑'을 합주했다. 국내 색소폰 열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행사였다. 색소폰 열기의 중심에는 동호회가 있고, 주축은 40, 50대. 국내 최대의 온라인 동호회 '색소폰나라'(www.saxophonenara.net)는 이미 2008년 회원 수 6만5천 명을 돌파했으며 소속된 지역별 동호회만 120여 개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색소폰나라가 회원들을 대상으로 표본 설문조사를 한 결과 73%가 40대 이상으로 나타났다.
색소폰 인구 급증으로 색소폰도 날개 돋친 듯 판매되고 있다. 코스모스악기사 대구지점에 따르면 속된 표현으로 피리 팔리듯 색소폰이 판매되고 있다고 한다. 덕분에 색소폰 수입액도 해마다 크게 늘어 무역협회와 관세청에 따르면 색소폰 수입액은 2000년 231만달러, 2004년 492만달러, 2005년 700만달러, 2006년 934만달러, 지난해에는 1천168만달러로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왜 색소폰인가?
색소폰이 중년들의 로망으로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초보자도 6개월 정도 배우면 웬만한 곡을 연주할 수 있을 만큼 익히기 쉬운데다 '중년의 고독'을 표현하기에 색소폰만 한 악기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
한울림윈드오케스트라에서 색소폰 파트장을 맡고 있는 박기붕(54·삼진제약 대구영업소 부장) 씨는 "젊은 시절에는 먹고살기 바빠 자신을 돌볼 여유를 갖지 못하다 나이가 들고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면 자신의 삶을 찾고 싶어집니다. 6개월 정도 배우면 가요는 충분히 연주할 수 있어 중년들이 색소폰을 많이 찾는 것 같습니다"고 말했다.
또 임준희 코스모스악기사 대구지점장은 "주5일 근무제 실시로 여가 시간이 많아졌고 은퇴 시기마저 빨라져 문화 활동에 관심을 갖는 중년들이 늘어났습니다. 여기에 색소폰 가격이 많이 낮아졌고 색소폰을 배울 수 있는 곳도 늘어나 색소폰 저변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습니다"고 설명했다.
색소폰 애호가들 중에는 학창시절 경험을 살려 악기를 다시 잡는 경우도 많다. 김희철 대구은행 부행장은 고교 재학 시절 밴드 활동을 했다. 현재 한울림윈드오케스트라 색소폰앙상블 멤버인 그는 솔로 연주를 할 만큼 색소폰 실력이 수준급이다.
◆색소폰 마니아들
색소폰 마니아들이 색소폰에 빠진 이유는 제각각이다. 하지만 꾸는 꿈은 같다. 자신이 원하는 곡을 훌륭히 연주하는 것이다.
조경환(52·한국조폐공사 화폐본부) 씨는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색소폰 애호가다. 그는 '욱수평화색소폰' 회장을 맡고 있으며 '아너스밴드'에서 색소폰 주자로 활약 중이다. '욱수평화색소폰'은 욱수성당에 다니는 정양수 옥산치과 원장과 이화조 영남대 교수, 조경환 씨가 2008년 결성한 단체. 현재는 30여 명의 멤버를 자랑할 정도로 커졌다. 다음달 6일 오후 8시 욱수성당 지하 강당에서 제2회 정기 연주회도 가질 예정이다. '아너스밴드'는 지난해 말 대구 수성구 시지태왕아너스아파트 주민들이 결성했다. 진재환(마스터 및 베이스), 최종덕(기타), 조경환(색소폰), 이지아(건반), 최문섭(드럼), 이보연(보컬) 씨 등 30~50대 남녀 입주민으로 구성돼 있다.
통기타로 대변되던 '7080' 세대인 조 씨가 색소폰과 인연을 맺은 것은 4년 전. "나이가 들면서 색소폰 소리가 참 매력적으로 다가와 오래전부터 배우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악기를 판매하는 지인을 통해 색소폰을 배우게 됐습니다."
처음 색소폰을 배울 때 그는 손에서 색소폰을 놓지 않았다. 가족들과 나들이를 가더라도 색소폰을 들고 갈 정도였다. "공원에서 가족들을 앉혀 놓고 색소폰 연주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부끄럽습니다.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면서 자랑하고 싶었던 마음이 앞섰던 것 같습니다. 하하."
레슨과 독학, 밴드 활동을 부지런히 한 덕분에 조 씨는 웬만한 음악은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을 쌓았다. 하지만 색소폰을 향한 열정은 여전히 뜨겁다. 클래식을 비롯해 난이도가 높은 곡을 연주하기에는 자신의 실력이 많이 부족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밴드 활동을 두 개씩 하다 보니 일주일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바쁩니다. 아너스밴드는 일요일, 욱수평화색소폰은 월요일 저녁 모여 단체 연습을 합니다. 틈만 나면 개인 연습도 해야 합니다. 부지런히 연마해야 소박한 제 꿈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색소폰 연주자로서 조 씨의 꿈은 6년 후 정년 퇴임을 하면서 개인 독주회를 여는 것이다. "지인과 가족들을 초청해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음악 10여 곡을 선곡해 연주 음반도 내고 싶습니다."
박기붕 씨는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색소폰을 잡은 것이 계기가 돼 열혈팬이 됐다. 그는 2004년 한 달 사이에 부모를 모두 여의고 6개월 후에는 장인 어른까지 돌아가시는 아픔을 겪었다. 믿기지 않는 일에 한동안 넋을 놓고 살았다. 이를 보다 못한 동생(박기섭·대구교육대 음악교육과 교수)이 그에게 권한 것이 색소폰이었다. 다른 일에 몰두하다 보면 상처를 잊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박 씨는 처음에는 개인 레슨을 받았다. 그러다 한울림윈드오케스트라에 들어가면서 색소폰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실력이 안 돼 여러 번 그만두려고 생각했습니다. 4개월 동안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악보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박 씨가 소속된 한울림윈드오케스트라 색소폰앙상블은 매년 한차례 정기연주회를 갖는다. 올해도 30일 오후 7시 어린이회관 꾀꼬리극장에서 연주회를 개최한다. "제 인생에서 색소폰은 특별한 존재입니다. 마음 둘 곳이 없던 시절, 제 마음을 잡아 준 것이 색소폰입니다. 색소폰의 음색은 사람의 음색을 가장 많이 닮았습니다. 색소폰을 통해 그리운 사람에 대한 아픔을 극복했습니다."
삼성전자 구미사업장 인사그룹 최용호(51) 부장은 아예 색소폰 연주곡을 수록한 2집 음반 '울림 그리고 쉼표'를 냈다. 지난 7월 말 여름 휴가 때 구미의 한 스튜디오에서 12시간 정도 고생하며 녹음한 노력의 산물이다. 아내의 권유에 따라 2006년 색소폰에 입문한 최 부장은 거의 독학으로 연습을 거듭해 2008년 말 색소폰 연주곡 21곡을 수록한 1집 음반을 냈으며 지난해에는 수성아트피아에서 아리랑팝스오케스트라와 협연하기도 했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사진 우태욱기자 wo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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