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추억이 뭉게뭉게… 산골운동회는 그렇게 익어갔다

청송군 파천면 파천초등학교에서 열린 '파천 한마음 대축제'

산골운동회에서 면민들이 서로 힘모아 줄다리기를 하며 화합의 장을 다지고 있다.
산골운동회에서 면민들이 서로 힘모아 줄다리기를 하며 화합의 장을 다지고 있다.
운동회도 식후경. 면민들이 함께 모여 음식을 즐기며 그간의 살아온 이야기로 화기애애하다.
운동회도 식후경. 면민들이 함께 모여 음식을 즐기며 그간의 살아온 이야기로 화기애애하다.
운동회 도중 면민들이 운동장에 나와 함께 어우러지며 한바탕 춤사위를 펼치고 있다.
운동회 도중 면민들이 운동장에 나와 함께 어우러지며 한바탕 춤사위를 펼치고 있다.

고향은 어머니 품과 같다. 외지로 떠나 있어도 마음은 늘 고향으로 향한다. 짐승도 죽을 때 머리를 고향으로 향한다고 하지 않는가. 짙어가는 가을, 고향 친구가 그립고 반갑다. 또한 부모님도 사무친다. 그럴 때면 타지의 애환과 사연을 고이 접어둔 채 발걸음은 먼저 고향으로 달려간다. 바쁜 사회생활로 명절 때도 그리운 친구를 만나기 힘든 요즘, 수십 년 만에 반가운 친구와 만나 정을 나눈다길래 다락같이 달려갔다. 지난달 22일 청송군 파천면 파천초등학교에서 열린 '파천 한마음 대축제'다. 초등학교 운동회지만 타지로 나간 친구와 선 ·후배, 면민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산골운동회'다.

#"영차 영차" 마을축제 모두가 한마음

청송 가는 길 곳곳에는 붉게 물든 사과가 가을과 함께 익어가고 있었다. 익어가는 가을 속에 친구의 그리운 마음도 물들고 있는 게 아닌가. 가을의 정취를 굽이돌아 파천초등학교에 도착했다. 푸른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속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파천초등학교(김종상 교장). 운동장에는 어르신, 아이, 면민 등 300여 명이 모여 운동회의 열기를 뿜고 있었다. 청명한 하늘과 신선한 가을바람도 오늘만은 친구였다. 만국기가 휘날리는 운동장에선 큰 공 굴리기, 장애물 릴레이, 훌라후프 돌리기, 박 터뜨리기, 엄마·아빠 찾기, 줄다리기 등 게임이 흥겹게 펼쳐졌다. 서로 손을 맞잡은 채 뒤뚱거리며 달려와 우스꽝스럽게 훌라후프를 돌리는 모습, 청백으로 나눠 오자미로 먼저 박을 터트리려는 꼬맹이들의 힘찬 몸짓, 보자기에 싸인 엄마를 찾아 나선 아이들의 천진한 모습이 가을 하늘 아래 '추억의 운동회'로 번졌다. 가을운동회의 절정은 역시 줄다리기. 청팀, 백팀으로 나눠 면민들이 '뎅~'하는 징소리와 함께 서로 지지 않으려고 "영차 영차"를 목청껏 소리치며 한뜻으로 줄을 끌어당겼다. 옆에 선 아이들도 청백으로 나눠 목이 터져라 응원하는 모습이 '가을의 수채화'로 다가왔다.

운동회가 끝날 무렵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아주머니 등 면민들의 한바탕 춤사위가 벌어졌다. 어설픈 몸짓이지만 진솔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우리네 어르신들의 신명나는 모습이었다. 가을의 아늑한 시골 풍경 속에서 산골운동회는 그렇게 익어갔다.

#친구야!, 반갑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노

어릴 적 가을운동회의 아련한 추억에 사로잡힐 즈음, 운동장 한쪽에선 정다운 이야기로 함박 웃음꽃이 피어났다. 어릴 적 추억, 초등학교 시절 짝사랑, 출향 인사의 고향 사랑, 사랑의 열매로 부부가 된 사연 등.

신수환(59·26회) 씨는 50여 년 전 어릴 적 추억의 회상에 잠겼다. 매일 등에 책보를 메고 집에서 학교까지 1시간 여 친구와 산길을 걸어야 했다. 학교 가는 산길은 재밌고, 짓궂었다. 등굣길에 친구와 찔레꽃, 산딸기를 따먹으며 몇 안 되는 여학생을 골려주기 일쑤였다고 회상했다. 개울에서 발가벗고 물장구치던 어린 시절의 친구, 소꼴 베러 산에 가 즐겁게 놀았던 친구의 모습들이 신 씨의 뇌리 속에 빛바랜 추억의 사진으로 남아 있었다.

김미영(33·여·52회) 씨는 초교시절 아련한 짝사랑의 추억을 담아냈다. 김 씨는 학교 다닐 때 좋아했던 남학생이 있어 그 친구의 책상도 정리해주고, 도시락을 책상 서랍 속에 몰래 넣어주며 관심을 표시했다고 한다. 그 친구는 그런 김 씨의 마음을 알면서도 끝내 모른 체하며 6학년 때 전학을 가버려 밤새 펑펑 울었다고. "지금도 보고 싶은데 참 보고 싶은데…. 당최 연락이 되지 않아서"라며 유머로 끝을 맺었다. 짝사랑 이야기가 나오자 옆에 있던 이정아(45·여·40회) 씨는 캔디 만화의 주인공인 테리우스처럼 생긴 선배를 짝사랑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대머리에 배도 나오고 해서 충격에 빠졌다고 해 주위의 웃음을 자아냈다.

초교 후배와 사랑의 결실을 맺은 황정욱(40·45회)·심은주(35·50회) 씨 부부. 황 씨는 고 3때 초교 6학년인 부인에게 교회에서 성가를 가르쳐 주면서 사랑을 싹 틔웠다고.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어서일까. 황 씨 부부는 성인이 된 뒤 서울서 같은 직장을 다니면서 결혼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지금은 고향에서 조그만 사업을 한다는 황 씨는 "처갓집과 뒷간은 멀어야 한다는데 고향의 같은 동네에 살아 때론 불편한 점이 많다"며 너스레를 늘어놨다.

명절 때에도 오기 힘든 고향이지만 산골운동회에는 어김없이 찾는다는 출향인 서진태(57·28회) 씨. 부산에서 온 서 씨는 당시 모교는 작은 산골학교였지만 전교생이 600여 명에 달했다고 했다. 학생 수가 줄어드는 세태가 안타깝지만 끈끈한 의리와 사람 만나기 좋아하는 고장은 청송이 으뜸이요, 청송 사람이 최고라고 이내 자랑을 늘어 놓기도 했다.

# "우리 그땐 그랬지" 웃음꽃… 이야기꽃…

추억의 이야기꽃이 무르익을 무렵 "진태야, 상오야 반갑다 친구야, 너거들 왔냐"며 권오영(57·28회) 씨가 인사를 건넨다.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했던가. 학교 졸업 후 오로지 고향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농사를 지으며 평생을 살아오고 있는 권 씨는 모처럼 만난 친구와의 해후가 너무 가슴 벅차다. 매년 만나는 친구이지만 느낌은 매번 새롭다. "객지에서 잘 살아가고 있는 친구들을 보면 가슴 뿌듯하죠. 면민 화합의 장을 통해 친구들을 만나면 고향을 지키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낍니다."

두런두런 이야기 속에 모교에 대한 말이 나오자 정미진(43·여·42회) 씨는 기다렸다는 듯이 파천초교 자랑을 늘어놓았다. 정 씨는 "모교는 2008년 '작은 학교 가꾸기 우수학교'로 선정돼 학급 당 8명의 학생이 선생님과 1대1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며 "전교생 61명이 형제·자매처럼 지내 대도시에서 종종 일어나는 '왕따' 란 생각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상급생은 하급생에게 형이자 누나이며 언니예요. 형제, 자매처럼 지내다 보니 가정에서 해 줄 수 없는 인성과 감성을 길러주며 소풍 갈 때에도 도시락 등 준비물을 학교에서 직접 챙겨줍니다." 정 씨는 이러한 노력으로 지난 2년 새 40여 명의 학생수가 60여 명으로 불어나 내실 있는 학교로 발전했다고 전했다.

작은 산골학교이지만 도시학생의 농촌체험처럼 시골학생의 도시체험도 활발히 하고 있다. 대도시에서의 지하철타기, 대형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책 고르기 등. 여름방학 땐 에버랜드·민속촌 방문이나 강원도 학교와의 교류학습 등 다양한 프로그램도 가동하고 있다.

김종상(54) 파천초교 교장은 "산골운동회는 면민들에게 학교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전하는 매개체이기도 하다"며 "또한 면민들의 화합과 학교에 대한 따뜻한 애정은 떠나가는 학교가 아닌 찾아오는 명품학교로 바꾸고 있다"고 말했다.

글·사진 전수영기자 poi2@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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