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원하겠다고 했을 때 모두 고개를 갸웃거렸다. 종합병원도 아니고 외과 의사가 개원해서 버틸 수 있겠느냐며 회의적이었다. 대학병원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도 받았지만 "밖에서 종합병원을 만들어보겠다"며 완곡히 거절했다.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고, 전공의를 하며 모은 돈으로 어렵사리 장만한 작은 아파트까지 팔았다. 병원을 짓는 것은 엄두도 못냈다. 지하 1층, 지상 4층 건물을 통째로 빌렸다. 꼭대기층에 살림집을 마련하고 3년을 그렇게 살았다. 24시간 진료였다. 새벽에도 환자가 오면 뛰어나갔고, 입원 환자가 통증을 호소하면 눈을 부비고 일어났다. 직원 7명으로 시작한 병원은 지금 전문의 21명, 직원 200여 명의 병원이 됐다.
◆"무조건 낫게 해주겠다" 안심
구병원 구자일(51) 병원장은 1991년 처음 개원할 때를 떠올리며 '무자용맹', 즉 "무식하다보니 용감했다"며 우스개를 던졌다. 대학 입시를 얼마 남겨두지 않고 갑자기 복막염에 걸렸단다. 아픈 배를 부여잡고 공부를 하는데, 그때 만난 외과의사(당시 레지던트이던 유완식 현 칠곡 경북대병원장)의 모습에 반해 외과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 결심은 줄곧 흔들리지 않았다.
"개원한 지 1주일 만에 환자 100여 명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일년 만에 16병상에서 50병상으로 늘렸죠. 한달에 수술만 100여 명, 외래 환자 300여 명을 봤습니다." 그는 환자들에게 믿음을 줬다. 고통을 호소하는 노인 환자에게 "무조건 낫게 해주겠다"며 안심시켰다. 맹장염, 복막염, 탈장, 치질 등 외과에서 할 수 있는 웬만한 수술은 다했다. "새벽에 일어나 밤 늦게 잠자리에 들 때까지 최선을 다했습니다. 수술 잘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환자들이 몰려왔죠. 특히 치질수술은 당시만 해도 민간요법에 의존해 완치가 어렵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우리에게 수술받은 환자들이 '치질 수술을 해도 재발이 없다'는 입소문을 내면서 환자가 빠르게 늘어났습니다."
그렇게 3년이 흘렀고, 내'외과와 정형외과, 신경외과, 소아과, 산부인과, 마취과, 방사선과까지 갖춘 120병상의 종합병원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호사다마랄까. 1997년 말 갑작스레 외환위기가 찾아왔다. 병원 시설투자에 돈을 아끼지 않았던 때였다. "이자율이 28%까지 치솟던 때였습니다. 한달에 이자만 1억2천만원 이상 나갔죠. 빚이 100억원에 이르렀습니다." 병원이 망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수술 환자에게 약도 제대로 못쓴다는 악성루머까지 들려왔다. 하지만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환자는 꾸준히 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98년 6월부터 빚이 줄기 시작하더군요. 병원 경영을 잘한다고 하는데, 제게는 진료가 곧 경영입니다."
◆남들은 꺼리던 항문질환 눈 돌려
구 원장에게 위기는 항상 기회였다. 1997년 일본 도쿄에 있는 대장항문 전문병원을 다녀온 뒤 특화병원에 눈을 떴다. "이미 일본에는 장기별로 특화한 전문병원이 추세였습니다. 서서히 방향을 전환할 때가 온 거죠." 당시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꺼리던 항문질환에 눈을 돌렸다. 10여년 전만 해도 구병원을 찾아온 치질환자는 한달에 30~50명선. 지금은 500~700명을 헤아린다.
여러 차례 위기가 찾아왔지만 그는 스스로를 믿었고, 병원 가족들을 믿었다. 순간 순간에 최선을 다하면 위기는 지나간다고 믿었다. 병원 규모는 커졌지만 여전히 시간을 가리지 않고 환자를 대했다. "내가 안되면 대학병원도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조건 치료하도록 했죠. 응급환자도 거부하지 않고 바로 치료했습니다. 주위에서 농담삼아 '구병원은 5차 병원'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한 번은 교통사고로 간이 파열된 환자가 응급실로 왔다. 혈압은 30으로 떨어졌다. 대학병원으로 옮기다가는 도중에 숨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보호자와 연락도 안되는 상황에서 구 원장은 담당 경찰관에게 즉시 수술을 해야겠다며 동의를 구했다. 몇 시간에 걸친 수술이 이뤄졌지만 끝내 환자는 숨졌다. 하지만 늦게 찾아온 가족들은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최선을 다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한 번은 5살난 어린이가 탈장 때문에 수술을 받으러 왔다. "수술대에 눕혀놨는데 그만 몸부림을 치다가 떨어졌습니다. 행여 다쳤을까봐 CT까지 찍고, 이후 후유증이 생기면 모두 책임지겠다고 했죠." 정성을 아끼지 않은 덕분에 환자는 무사히 퇴원했고, 아이의 부모는 항의는커녕 오히려 믿을만한 의사라며 다른 환자를 소개시켜 주었다.
◆안주하는 순간 추락
지난 6월 15일 구병원은 작은 기념식을 가졌다. '대장'항문(대장암, 직장암, 치질, 치루 등) 질환 수술 5만5천 사례 달성 및 대장암'직장암 복강경 수술 200사례, 대장암'직장암 수술 800사례 달성 기념식'이었다. 이런 진료 실적은 국내 3위에 해당한다.
2007년 130억원을 들여 병원을 완전 리모델링했다. 사람과 건물 뼈대 말고는 다 바꿨다. 환자 편의를 위해 CT 및 MRI실은 1층에 두었고, 대장항문센터, 유방갑상선센터, 종합건강센터, 대장내시경센터, 수술실 등을 깔끔하게 새로 단장했다. "1997년에도 병원을 확장한 뒤에 외환위기가 찾아왔는데, 2007년에도 빚을 내서 병원 리모델링을 하고 나니 금융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다행히 큰 어려움 없이 넘어갔지만 힘든 때도 많았습니다." 그는 꾸준한 병원 투자가 바로 환자를 위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구 원장은 병원은 비행기나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안주하는 순간 그저 머물거나 멈칫하는 게 아니라 바로 추락하는 겁니다. 많은 돈을 벌어서 현금으로 투자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병원 여건이 허락하는 한 투자를 멈추지 않을 겁니다."
시설에 대한 투자만이 아니다. 국내외 학술대회 및 연구활동에 매년 참가한다. 매주 수요일이면 대장항문 진료팀과 함께 최신 수술법에 대한 연구회를 열고 있다. 환자를 대하는 임상 의사들은 3년마다 의무적으로 논문도 발표토록 할 예정이다.
내년 3월부터 영남대병원 의료원장을 역임하고 대장학문학회 회장을 지낸 바 있는 심민철 박사가 구병원에서 진료를 시작한다. "제 은사이기도 한 심 박사님이 합세하면 구병원의 진료팀은 더욱 막강해질 겁니다." 질환 부위의 특성상 젊은 여성 환자들이 부끄러워서 검진이나 치료 받기를 꺼릴 수 있다. 그때문에 지난봄에는 대장항문 분야 여성 전문의인 김현진 과장도 영입했다.
"병원은 앞으로 치료 중심 병원에서 예방 중심의 진료 및 검사 위주의 병원으로 변할 겁니다. 우리 병원도 1회 방문으로 대장내시경 검사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췄습니다." 구 원장은 "지금도 어떤 환자가 자신을 기다릴 지 설레인다"고 했다.
글'사진=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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