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청원군 내수읍 초정리는 '약수'로 유명해진 동네다. 이곳의 약수는 세계광천학회에 의해 미국 샤스터 광천, 영국 나포리나스 광천과 함께 세계 3대 광천으로 꼽힌다. 미국식품의약국(FDA)이 라듐 성분 등 기능성 물질이 다량 함유된 빼어난 물로 인정했을 정도다. '초정'(椒井)이라는 지명도 '산초처럼 톡 쏘는 물이 나는 우물'이라는 뜻이다.
국내에서의 반응도 그랬다. 전국 각지에서 관광객이 몰렸다. 초정 약수의 역사는 길다. '동국여지승람'과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과 세조가 눈병·피부병·속병을 이곳에서 다스렸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세종대왕은 1444년 117일 동안 행궁(임시 궁궐)까지 짓고 초정에서 머물기도 했다.
하지만 초정약수의 인기는 딱 20~30년 전까지다. 최근엔 '물 노다지'를 꿈꾸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논밭을 가리지 않고 마구 파대는 바람에 지하수 고갈과 오염 등의 '상처'를 남겼다. 결국 초정은 사람이 찾지 않는 버려진 동네로 전락하고 말았다.
◆폐허로 변한 초정=28일 찾은 충북 청원군 내수읍 초정리는 기대와는 영 딴판의 광경이 펼쳐졌다. 이곳이 '초정 광천수'로 유명한 곳이 맞나 하는 의아심만 들 정도. 마을엔 온천과 찜질방, 식당들이 많이 있었지만 대부분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왕래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약수터에서 물을 뜨고 있는 한 주민은 "지난해 초정약수가 오염됐다는 뉴스가 나간 이후 관광객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사람이 없으니 온천이나 식당도 대부분 문을 닫았다"고 했다.
주위엔 짓다가 만 건물들도 더러 있어 흉물스러움을 더했다. 이곳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신모(45) 씨는 "몇 년 전만 해도 관광버스가 매일 수십 대씩 관광객들을 실어 날랐는데, 요즘은 개미새끼 한 마리 볼 수 없는 유령도시로 변했다"며 "올 들어 청원군이 옛 영화를 되찾고자 사람이 모이는 곳으로 바꾸는 데 힘을 쏟고 있지만 회생의 기미가 안 보인다"고 혀를 끌끌 찼다.
실제로 초정에 있는 대형 온천 4곳 중 3곳은 폐업을 한 상태였다. 그 중에서 지하 1층·지상 5층 규모의 대형 온천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관광호텔 초정약수스파텔'이란 간판을 단 건물의 내부에 들어서자 곰팡이 냄새가 한가득 반겼다. 그곳 관리인은 "청원군이 1999년 군의 세수입을 늘리기 위해 민간업체와 손을 잡고 수백억원을 들여 휴양형 관광호텔을 지었는데 개장 3개월 만에 민간업체의 부도로 군은 회원권에 대한 빚만 잔뜩 떠안았다"며 "이후 적자 눈덩이에 시달리다 5년 전쯤 문을 닫고 매각 공고를 냈지만 지금껏 새 주인을 못 찾고 방치되고 있다"고 말했다. 초정약수스파텔은 2006년 첫 공매가 시작돼 현재까지 네 차례 유찰됐으며, 지역 시민단체들은 스파텔 민자유치 사업에 수백억원의 혈세를 낭비했다며 '밑 빠진 독상'을 주는 등 전시성 사업의 표본으로 낙인 찍히는 신세가 됐다. 초정에 자리 잡은 많은 대형건물에 켜켜이 쌓인 먼지와 거미줄이 한때의 영광을 간직한 초정약수의 위상을 대변하는 듯했다.
◆가스가 사라진 탄산수=초정약수는 탄산수로 유명하다. 세종대왕이 눈병을 고치고 세조가 피부병을 고쳤다는 얘기도 라듐 성분이 다량 함유된 천연탄산수이기 때문이다. 한창 전성기 때엔 전국의 위장병·피부병 환자들이 치료수로 많이 사용했단다.
하지만 이젠 초정약수를 탄산수로 부르기엔 문제가 많아 보였다. '현대판 봉이 김선달' 때문이다. 물이 좋다는 소식에 생수 및 음료수 제조업체와 목욕탕·음식점·모텔 등이 우후죽순 들어서면서 마구 지하수공을 뚫은 탓이다. 청원군에 따르면 초정리에만 신고된 지하수공이 300여 개나 된다. 이처럼 마구잡이로 뚫어댄 지하수공으로 탄산가스가 대량으로 새어나오면서 가스가 없는 '맹물' 수준으로 변한 것. 초정이 고향인 윤복순(75) 할머니는 "초정약수가 예전엔 톡 쏘는 맛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맛이 없어졌다"고 했다. "30년 전만 해도 약수터 근처에 가지도 못했어. 코끝이 얼얼할 정도로 물이 톡 쏘고 독해서 그랬지." 실제로 초정약수를 마셔봤더니 다른 약수와 비교되는 별다른 맛을 느낄 수 없었다.
◆낮아지는 지하수 수위=초정 주민들은 마구잡이 개발로 초정약수가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기자와 동행한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성익환 박사는 "물에 대한 무지가 초정리를 폐허로 만들었다"고 진단했다.
청원군에 따르면 30년 전 초정에는 3곳의 생수업체와 음료수 제조업체가 있었다. 그 중 풀무원과 스파클은 10여 년 전 공장을 괴산과 음성 등으로 이전했으며, 지금은 '맥콜'을 생산하는 일화공장만 남았다. 성 박사는 "지하수에 대한 관련법이 없다 보니 마구잡이로 남용하는 추세가 이어졌고 결국 초정의 지하수 수위가 계속 낮아지는 결과를 초래했다"며 "풀무원과 스파클의 생수공장도 초정 지하수량이 떨어지고 방치된 폐공을 통한 오·폐수 유입과 농약 등으로 오염이 가중되면서 사업성이 떨어진다는 판단에 다른 곳으로 이전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예전 스파클 생수공장에 근무했다는 한 주민은 공장이 이사 간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20~30년 전 매일 지하수를 마구 뽑아 쓰니까 초정엔 더 이상 양질의 지하수가 안 나왔어요. 다른 방도가 없어 회사가 생수 취수정을 초정과 인접한 마을에 뚫었는데, 그 마을 사람들이 '동네 우물·농업용 관정이 말라붙는다. 초정 꼴 나기 싫다'며 군에 진정을 내 사용하지 못하게 했어요. 결국 풍부하고 깨끗한 지하수를 찾아 공장을 옮긴 것이에요." 현재 풀무원과 스파클 공장 터는 논과 공원으로 변한 상태다.
㈜일화 초정공장 한 관계자는 "초정의 지하수위가 자꾸 낮아져 우리도 요즘은 하루 400㎥의 지하수만 사용하고 있다. 이는 한창때 쓰던 지하수량보다 70%가량 줄인 것"이라며, "20년 전만 해도 초정에서는 생수공장과 온천·호텔·음식점에서 하루 2천~3천㎥의 지하수를 퍼올려 사용했다"고 말했다.
◆지하수 남용은 위험=전문가들은 초정의 사례에서 보듯 지하수를 마구 쓰는 것은 귀중한 우리의 유산을 마구 버리고 생명수를 죽이는 위험한 행동이라고 지적했다. 성 박사는 "초정의 사례처럼 자신의 땅에서 노다지를 캐겠다는 욕심과 시추업자의 부추김이 맞아떨어져 무분별한 개발을 일삼은 것이 수백년간 깨끗한 약수의 고장으로 불렸던 한 마을을 몰락하게 만든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관할 행정기관인 청원군은 초정리를 비롯한 지역 내 지하수 남용을 막기 위해 2000년 이후 온천 등 단 한 건의 개발허가도 내주지 않았다. 게다가 지하수 관정을 새로 뚫는 행위 자체를 금지시켰다. 더 이상 지하수 남용을 방치할 경우 군 전체가 폐허가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지하수의 오남용과 수질오염을 막을 수 있는 관리 시스템이 미흡하다는 것이다. 초정리의 경우 신고된 지하수 관정 수가 300여 개나 된다. 하지만 정확한 지하수 저수량과 암반을 거쳐 재생산되는 지하수량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한 최근 자료는 없는 상태. 특히 취수량이나 성분에서 생수 생산 조건에 맞지 않아 방치되고 있는 폐공이 얼마나 있는지, 이 폐공을 통해 지하로 흘러들어가는 빗물, 생활하수, 축산폐수, 농약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한 정확한 자료가 전무하다.
청원군 수질담당 관계자는 "초정약수가 심각한 수준에 있다고 판단하고 있지만 가장 최근 자료가 10년 전에 만든 것이어서 올해 8월부터 초정리 전체의 지하 세계를 대상으로 전수조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인력과 예산 부족에 허덕이고 있다고 했다. 그는 "지하수를 많이 쓰는 곳과 어떤 영업장이 있는지 등에 대해 중점조사할 방침으로, 내년쯤 결과물을 내놓을 계획이지만 담당자 한 사람이 맡기엔 너무 광대한 조사인데다 예산도 턱없이 부족해 2개월 동안 진척이 없다"고 털어놨다.
◆옛 초정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나=사람의 발길이 뚝 끊긴 초정은 옛 영화를 되찾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초정약수를 되살리고 주변 경관을 가꿔 사람이 모이는 곳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청원군은 '초정문화공원 조성사업'에 착수했다. ▷초정약수터에 세종이 머물던 행궁을 복원하고 ▷행궁 옆에는 약수 연못을 만들고 ▷전통놀이 마당과 약초동산, 정자, 산책로 등을 설치할 계획이다.
이와 병행해 초정약수를 살리는 방안도 강구 중이다. 군은 현재 초정리의 개인 소유 약수원을 모두 사들이고 있다. 올해 8월 시작한 초정약수 전수조사 결과가 내년쯤 나오면 군이 직접 지하수 개발량 등을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청원군 관계자는 "그동안 무분별한 개발과 지하수 남용이 초정약수의 오염과 질 저하로 이어졌다는 지적에 따라 앞으로는 철저하게 관리할 방침"이라며, "지하수는 석유처럼 완전히 고갈되는 것이 아닌 만큼 10년 정도 보존하면 다시 회복될 수 있다고 기대한다"고 말했다.
정욱진기자 pencho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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