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낙동과 의성 낙정을 가르는 낙동강 물길이 남으로 구미 해평습지를 향해 굽이친다. 신곡천이 남쪽에서 강으로 스며들고 있다. 낙동강은 남서쪽에서 땅을 기름지게 하고, 월암산과 월암서원은 북쪽에서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구미 도개면 월림1리 월곡은 달빛이 아름다운 마을이다.
달빛에 비친 바위가 아름다워 월암산이고, 달이 마을을 비추니 북쪽 월암산의 우거진 숲과 어울려 더 아름답다고 월림리이다. 또 달이 뜨면 마을을 환하게 비추어 뒤편 계곡이 맑게 보인다고 월곡마을이다.
구미 월곡은 일찍이 물과 전기를 잘 활용한 선진 농촌마을이다. 다른 마을보다 훨씬 빨리 양수장을 통해 기름진 땅을 일궜다. 전기를 재빨리 끌어들여 양수장을 돌리고 정미소를 가동했다. 월곡은 또 고려 말, 조선 초 절개를 지킨 세 명의 충신을 모신 월암서원을 품은 마을이기도 하다.
◆양수장과 정미소, 그리고 새마을운동
월곡은 달빛이 아름다운 마을인데다 물과 농토가 풍요로운 살기 좋은 마을이기도 하다.
월곡의 풍요는 바로 일찍이 들여온 양수장과 전기시설 덕분이다.
양수장의 빠른 보급은 월곡마을의 풍부한 식량 생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농촌과 산간 오지에 양수장 설치가 본격화된 1980년대 초반까지 대부분의 농촌에서는 천수답에 의존했다. 하지만 월곡마을은 다른 지역보다 30여 년 앞선 1944년 부지측량을 시작해 1947년 양수장을 완공했다. 마을은 풍부한 농업용수로 인해 더 이상 물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이 때문에 웬만한 가뭄도 이겨내고 매년 풍작을 기대할 수 있었다.
50여 년 양수장을 관리해온 장진환(76) 씨는 "가뭄이 들어도 양수장이 있으니까 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거든. 우리 마을 말고도 도개면 전체로 물을 내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장 씨는 양수장 초기에는 서너 명이 붙어 펌프를 일일이 손으로 돌렸는데, 지금은 스위치 한 번만 누르면 된다고 예전보다 훨씬 나아진 시설을 설명했다.
양수장은 농업용수 공급은 물론 간이 목욕탕과 고기잡이의 추억이 깃든 곳이기도 했다.
장 씨는 "이 물을 끌어올려 가지고 고이면 고기도 많이 올라와 잡았고, 저녁 먹고 내려와 동네 사람들이 목욕도 하고 그랬다"고 했다.
전기시설은 현 낙동강 제방을 쌓기 전 강변을 빼곡히 둘러쌌던 포플러 나무를 팔아 들여왔다. 일제강점기인 30년대 심은 포플러 나무는 마을로 부는 남서풍을 막아주는 방풍림의 역할과 홍수조절 기능도 함께했다.
정하식(77) 씨는 "우리 어릴 때 포플러 나무를 심었는데 바람도 막고 농경지 유실도 막고 여러 가지 좋은 걸 했어"라며 "60년대 나무를 베어 팔고, 나무젓가락도 만들어 팔아 그 돈으로 전기를 넣었는데, 다른 데보다 훨씬 빨랐지"라고 말했다.
마을은 60년대 초반 도개면 소재지보다 더 일찍 밤에 환한 불빛을 만끽할 수 있었다. 전기시설로 인해 마을에 도정공장(정미소)도 일찍 세워졌다. 정미소는 노동력이 많이 필요한 밀과 보리 경작이 줄어든 80년대까지 월곡은 물론 도개면 인근 지역을 아울러 운영됐다.
월곡의 대규모 도정공장은 50, 60년대 밀과 보리농사, 70년대 통일벼 보급 등에 따라 인근지역 농민들까지 모여들어 성황을 이뤘다.
정 씨는 "옛날에는 이모작할 수 있는 땅에 겨울에 보리를 심어 봄에 수확했는데, 도정 시설이 잘 돼 있어 여기 와서 찧으러 외지에서도 많이 왔지. 70년대에는 통일벼가 많이 나와 도정공장이 잘 돌아갔는데"라고 했다.
90년대 이후 월곡마을은 밭작물로 깨, 고추, 배추는 물론 수박, 방울토마토 등을 주로 경작하고, 10여 가구는 소를 대량으로 기르고 있다.
양수장과 전기시설의 빠른 보급은 월곡의 근대화를 크게 앞당겼다. 특히 70년대 시작된 새마을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그 성과에 대한 주민들의 자부심도 크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고향이란 점을 감안해 지붕 개량, 길 닦기, 마을 청소 등에 적극 나서 상도 받았다고 한다.
정 씨는 "1971년도 새마을운동 시작할 때 전국에서 1등을 했다고. 전국에서 모범을 보였는데 대통령 고장이라고 해서 대통령상 안 주고 국무총리상으로 대체한다 그래"라고 했다.
◆절개가 숨 쉬는 월암서원
마을 뒤쪽 월암산에 등을 기대고 낙동강 물길을 내려다보고 있는 월암서원. 당초 농암(籠巖) 김주(金澍),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 경은(耕隱) 이맹전(李孟專) 등을 모신 곳이다.
농암은 고려 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고려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며 귀국하지 않고 명나라에 망명했다. 당시 입었던 옷과 신은 본국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단계는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세조에 맞서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실패해 죽임을 당했고, 아들도 연좌됐으나 죽음에 의연했다고 한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경은은 수양대군(세조)이 황보인, 김종서 등을 제거할 때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여생을 보냈다.
1630년(인조 8년) 선산부사 조찬한 등이 농암 선생을 모시는 사당을 세웠고, 3년 뒤 삼인사(三仁祠) 봉안문을 지어 단계와 경은 선생을 추가로 배향했다고 한다. 1694년(숙종 20년) 월암서원으로 사액됐다.
월암서원은 1868년(고종 5년)에 철폐됐다 중건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뒤 2008년부터 복원공사를 벌여 지난달 29일 완공, '월암서원 복원 낙성 고유제'를 지냈다.
김선교(75) 씨는 "농암, 단계, 경은 세 어른은 고려의 복권이나 단종 복원운동을 했기 때문에 조선으로 봐서는 역적이었지. 일선 김씨 문중에서 상소를 올려 숙종 때 사면이 됐다고. 사당이 생기면서 일선 김씨들도 이 마을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고"라고 말했다.
김 씨는 이어 "이 마을에 사당과 서원이 있으니 일선 김씨들이 자주 왕래했고, 옛날 어른들이 '사당 근처에 가까이 와라'고 해 옮겨온 집이 많다"며 "우리 집도 나한테 11대 할아버지가 이 마을로 이사 온 뒤 정착해 지금까지 이어져왔다"고 했다.
절개를 품은 월암서원은 월암산을 배경으로 바로 앞 양수장과 낙동강을 바라보며 380년 동안 변화해온 월곡마을을 지켜왔다.
◆월곡진나루터와 뱃사공
월곡에서는 1967년 일선교가 개통하기 전까지 나룻배를 운행했다. 주민들은 주로 선산 장을 가거나 낙동강 건너편 옥성면 초곡리에 나무를 하러 가기 위해 나룻배를 이용했다. 특히 물이 불면 상류 쪽에서 버스 등 차량까지 싣고 운행할 만큼 규모가 있는 나룻배도 있었다. 월곡진나루터는 마을 중앙 앞 강변에 있었지만, 장마철 강물이 불면 원하는 쪽으로 배를 몰기 위해 상류쪽 양수장 인근까지 올라가 배를 띄워야 했다. 장마철 원 나루터에서 배를 몰면 물길을 따라 엉뚱한 곳에 다다르기 때문이다.
당시 뱃사공들의 수입은 쏠쏠했다고 한다. 배를 몰았던 주민들은 '배 모는 게 농사보다 나았다'고 입을 모았다.
장운환(79) 씨는 "장가가기 전부터 (배) 몰았지. 배 봐주고 집집마다 (쌀, 보리) 한 말씩 받아야 돼. 100가구 정도 되니깐 괜찮았지"라고 했다.
"선산 장에 가면 30명씩 타고, 소도 타고 그랬지. 배가 컸어. (상주) 낙동'(의성) 낙정마을에서는 버스 싣고, 차도 싣고…."
장진환 씨는 "강물이 많을 때는 술 안 먹고는 못 몰아요. 술을 먹어야 담력이 좀 생기고. 보통 담력 가지고는 시퍼런 물 위로 몰기 힘들어서"라고 했다.
60년대 후반 이후 다리가 놓이고, 도로가 뚫리기 전까지 배는 월곡의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던 셈이다. 구미 도개면 신림리와 선산읍 생곡리를 잇는 일선교가 개통되면서 나룻배와 뱃사공도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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