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활의 고향의 맛] 나들이 상어회

가난과 설움에 지친 시인의 영혼을 달래주는 신지도

그 섬에 꼭 가고 싶었다. 그곳에 가서 무슨 맛있는 음식을 먹고 즐길 생각은 아니었다. 잔잔한 물결이 애무해 주는 해변의 모래사장을 걸어보며 낭만에 젖기 위함은 더더욱 아니었다. 외로운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찾아간 그곳이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그것이 보고 싶었다.

신지도는 의지할 곳 없이 떠도는 영혼을 위무해 주는 위로의 섬이다. IMF라 불리던 외환위기가 터지자 더 이상 서울에서 버틸 수 없었던 시인 김신용이 신지도를 찾아간다. 살고 있던 반 지하 전세금을 빼내 채소장수 친구의 트럭에 몸을 실었다. 가난과 설움 그리고 참을 수 없는 울분을 몽땅 쓸어 담아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 닿은 곳이 전남 완도군 신지면 임촌리 바닷가였다.

#낯설고 서러웠던 신지도의 풍경

서울역 앞 양동 창녀촌에 살 때도, 겨울을 포근하게 지내기 위해 일부러 도둑질하여 감방에 들어갔을 때도, 달동네 판자촌에서 '땟거리'가 떨어졌을 때도 희망을 잃지 않고 시를 썼다. 그러나 신지도 푸석한 모래밭에 첫발을 내딛자마자 생애 중에 그날처럼 앞이 캄캄한 날은 정말 없었다고 했다.

아무리 낯설고 누더기처럼 헤진 풍경까지도 시인의 눈에 들어오면 모두 시가 되었다는데 신지도는 그게 아니었다. 말문과 글문이 한꺼번에 막혀 꺼이꺼이 울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서쪽 바다의 노을하며 소나무 숲에서 들리는 새소리 그리고 추억이 조개껍질로 박혀있는 지난 여름날의 흔적조차도 시가 되지 못했다. 가난과 남루에 짓눌린 그동안의 서러운 생활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서정으로 풀어낼 가망을 지워버린 것이다.

쌀을 사기 위해 그는 지게꾼이 되었고 지게를 잃어버렸을 땐 굶었다. 배가 고파도 시간은 아주 느리게 지나갔다. 시간을 죽이는 약은 막걸리에 소주를 섞은 작살주뿐이었다. 몇 잔 마시고 나면 내장 곳곳이 가로등 켜진 것처럼 환해지고 마침내 똥구멍이 노글노글해지면서 '씨부랑 탕' 욕이 나온 다음 시가 나왔다고 했다.

#사랑은 환상이 아닌 현실

시인은 열여섯 나이에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창녀촌에서 살았다. 피를 팔아 라면을 샀고 한 번 받았던 정관수술을 다시 받아 정부보조금을 두 번 챙겨 허기를 면했다. 그의 친구들은 양아치 창녀 지게꾼 마약중독자 소매치기들이었다.

"수건을 입에 물고 색소폰을 불면/ 소매치기 벙어리 여인은 노래를 불렀지/ 문둥이 미스 리는 몽그라진 손으로 젓가락을 두드리고/ 돗자리 부대 남희 엄마 넘치도록 막걸리를 따뤘지/ 속치마 바람으로, 자고 가요, 제발/ 자고 가요, 지나가는 남자만 보면 술 취해 미친 듯/ 손 흔드는 남희 엄마 기어이 부녀보호소로 끌려가고/ 벙어리 여인 신음 하나 행적 없이 사라지고/ 미스 리 또한 소록도를 향해 풍문으로 떠나갔지만."(김신용의 시 '수건 색소폰'의 부분)

그의 시는 이른바 가진 자와 유식한 자들이 호사스럽게 즐기는 사랑에 관한 가식된 휘장은 무참하게 벗겨버린다. 그의 시에 나타난 사랑은 환상이 아닌 현실이며 관념이 아닌 실체로 오로지 정신이 아닌 육체만이 사랑 속에 잠입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플라토닉이니 에로스라는 말 자체를 거부하고 밑바닥에 널브러진 쭈그러진 성기를 주워 시를 썼다.

#외로움과 추위를 견뎌낸 사람들

신지도는 유형의 섬이었다. 조선조 때도 46명의 선비들이 이곳에 귀양을 왔다. 송강 정철의 현손 정호, 서예가 이광사, 다산의 형인 정약전도 이곳에서 8개월이나 살다가 흑산도로 이배되었으며 '석재별고'를 쓴 윤행임과 시조를 많이 지은 이세보도 신지도의 외로움과 추위를 견뎌낸 사람들이다. 시인 김신용도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이 시대의 선비 김신용이 머물다 떠난 신지도를 찾아 명사십리 모래밭 텅 빈 여관에서 하룻밤 자고 가기로 했다. 완도 여객선터미널 옆 어시장에서 뼈째로 썬 상어회 한 접시를 사들고 그 섬으로 들어갔다. 철썩이는 파도에 부대끼고 있는 가난한 시인의 맑은 영혼을 만나기 위해.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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