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 올 스톱! 모두 나와서 사진 한번 시원하게 찍자."
작업복 차림을 한 동아인쇄사 서만석(56) 대표의 우렁찬 목소리가 공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이내 전 라인의 생산 공정이 멈췄고 80여 명의 직원들이 앞마당에 모여였다. "손해가 많이 나지 않느냐"는 물음에 그는 "이럴 때 식구들끼리 얼굴 한번 보는 거죠?"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호탕하고 온화한 모습 뒤엔 날카로움도 엿보였다. "인쇄업은 단순한 공정이 아니에요. 유통, 광고, 디자인, 창의성 등이 결합한 문화 사업입니다." 그는 "대구 영세 인쇄업체들이 중소기업으로 거듭날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현행 신고제로 운영되는 인쇄업을 허가제로 바꿔야 한다"며 쓴소리를 쏟아냈다. 4일 오전 대구 인쇄업계의 선두그룹 주자인 동아종합인쇄사(달서구 월암동)를 찾았다.
◆만석꾼 사장님
만석꾼은 서 대표의 별명이다. 우직하면서도 근면한 성격을 빗대 직원들이 붙여줬다. 그러나 만 명의 직원이라도 평생 책임지겠다는 서 대표의 소신이 빚어낸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는 "현재 직원 모두가 제 일처럼 업무를 보고 있는데 수가 얼마로 늘든 한 가족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고교시절 첫 인쇄업과 인연을 맺은 뒤 끈끈한 동료애를 사훈으로 삼을 정도로 직원 간 우애를 강조한다.
평생 업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의리를 중시하는 성격때문에 학급 친구들의 잘못을 대신 뒤집어쓰기를 수십 번. 서 대표는 학창시절 학교와 가족에게 이름난 사고뭉치였다. 그러나 어느 화창한 오후에 있은 그 일(?)이 인생을 바꾼 계기가 됐다. "고 3 이맘 때쯤 중구 대신동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다 나도 모르게 자전거를 세웠어요." 길가 한 소형 인쇄 업체의 반쯤 열린 문틈으로 사내들이 조각조각 활판을 맞춰나가는 모습이 신기했다는 것. "신문도 이렇게 만들어지는구나" 그날로 부모님을 설득해 그 인쇄소에 취직했고 38년째 인쇄업에 몸담고 있다. 이후 갈고 닦은 기술로 1990년 동아인쇄사를 차렸다. 때문에 서 대표는 인생 항로를 정해주고 인쇄 기술까지 전수해 준 이강민(80) 옹을 지금까지 극진히 모시고 있다. "제 인생의 스승이고 사업의 선생님인데 당연히 잘 모셔야죠." 대구경북의 구텐베르크로 불리기를 원하다는 그. 앞으로 서 대표의 횡보가 주목받는 이유다.
◆금메달리스트 VS 생활의 달인
같은 날 오전 11시 동아인쇄사 포장라인. 작업대 앞 문영자(51·여) 주임의 손놀림이 남다르다. 겹겹이 쌓인 길쭉한 자동차 와이퍼 포장상자가 쉴새 없이 밀려들지만 지체하는 법이 없다. 왼손을 뻗으면 정확하게 상자 25개가 잡힌다. 이후 오른손을 이용해 부채 모양으로 상자를 편 채 앞뒤를 훑는다. 불량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이 1초도 채 걸리지 않는다. 간혹 부채꼴로 펼쳐든 25개의 상자 중 하나를 골라 다른 상자에 담는다. 불량을 솎아 낸 것. 그러나 기자의 눈으론 불량품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경력 3년의 문 주임은 "희미하게 가는 줄이 가 있잖아요"라며 작업을 이어갔다.
동아인쇄사의 달인은 또 있다. 관리부장인 서호진(28) 씨. 8개월 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서 대표에게 경영수업을 받고 있는 장남이다. 서 부장은 경영 달인으로서의 포부도 대단하지만 화려한 전적이 있는 진짜 달인이다. 2006년 이탈리아 토리노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5천m 계주에서 금메달을 따 낸 올림픽 영웅인 것. "운동만 힘든 줄 알았는데 현장에서 일 배우는 게 더 고된 것 같아요." 금메달리스트도 작업 라인 앞에선 푸념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또 다른 세계를 개척한다는 데 젊음을 바치고 있었다. 서 씨는 "직접 회사에 나와 생활해 보니 인쇄의 모든 과정이 디지털화 돼 있는 등 공정 전반에 대해 놀랐다"며 "그러나 인쇄기술은 우리가 일본보다 앞서지만 인쇄기계를 일본에서 사다 써는 것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인쇄 사업에서도 꼭 금메달을 따겠어요."
◆꿈을 펼쳐라
"후배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회사예요." 본관 3층 디자인실. 책상마다 칸막이가 쳐져있고 은은한 커피향이 흐르는 등 잘 나가는 대기업 사무실 못지않다. 사무실에는 30인치 평면 모니터 앞에서 10여 명의 디자이너들이 시안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2008년 입사한 김정수(33·계명대 미술 전공) 씨는 "구인 정보를 보고 취직했지만 입사하고 나니 비전이 있는 회사라는 걸 느꼈다"며 "꿈을 펼쳐보고 싶다"고 말했다.
5개월 전 기획사에서 이직한 웹디자이너 조선희(28·여) 씨는 "처음엔 인쇄공장이라고 해서 딱딱한 분위기일거라 생각했는데 생각이 180도 바뀌었다"며 "다양한 인쇄물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까닭에 디자인 공부까지 된다"고 말했다. 홍석만(25·금오공대 전자공학과 휴학) 씨는 "헬스장, 식당, 기숙사 등 사원 복지시설이 너무 잘 갖춰 있고 회사분위기도 너무 좋다"며 "후배들에게 입사를 추천해 주고 싶다"고 말했다.
임상준기자 news@msnet.co.kr
사진=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정진호의 매일내일(每日來日)] 3·1절에 돌아보는 극우 기독교 출현 연대기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김세환 "아들 잘 부탁"…선관위, 면접위원까지 교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