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유와 패션 도시를 표방하고 있는 대구. 그러나 시계 바늘을 몇십 년 전으로 되돌리면 패션과 예술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최복호 패션은 대구에서 만날 수 있었던 패션과 예술의 유일한 기억이었다. 당시 세대는 최복호 의상실 앞에서 화려하고 오묘한 색색의 의상들을 바라보며 잠시나마 패션과 예술에 대한 욕구를 달랠 수 있었다. 이후로도 최복호 패션은 오랜 시간 대구의 문화와 패션을 대표했다.
그랬던 그가 최근 도심을 뛰쳐나와 청도에서 새로운 패션과 예술의 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다. 늦가을 햇살이 제법 따가웠던 1일 청도의 붉게 물든 단풍 속에서 디자이너 최복호(61) 씨를 만났다. 인터뷰가 이루어진 장소는 청도 각북면에 위치한 최복호 패션문화연구소로 그가 직접 디자인해 지은 건물이다. 'FUN & 樂'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곳에 들어서자 사방이 온통 형형색색의 색깔로 가득해 눈이 부실 정도다.
◆패션과 예술을 묶다.
'꽁지머리, 동그란 호빵 모자와 안경, 화려한 넥타이, 꽁지가 말려올라 간 제비바지….' 만화 캐릭터 같은 모습에 '풋~ '하고 웃음이 나올 뻔했다. "꽁지머리는 왜 하나요?" 준비해 간 질문 보따리를 미처 풀기도 전에 불친절한(?) 질문이 튀어나와 버렸다. "10여 년 전 외환위기(IMF)가 왔을 때 막 시작한 패션 사업이 굉장히 힘들었어요. 더구나 남자 디자이너는 생명이 대부분 짧아요. 미래에 대한 불안과 사업의 불투명성 때문에 밤잠을 못이룰 정도였어요. 머리를 기르기 시작해서 머리를 묶고나서야 갈등하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지요."
꽁지머리로 시작된 첫 대화는 자연스레 그가 청도에 세운 패션문화연구소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청도의 아름다운 자연에 반했어요. 병풍처럼 이어진 산세와 아름다운 자연풍광은 그 자체가 신이 빚은 예술품처럼 느껴졌어요." 그래서 주저없이 최복호 패션문화연구소를 세웠다고 했다.
순간적인 외도(?)가 아닐까 하는 의문도 있지만 "오래 전부터 마음 속에 품어 온 일이었다"고 거침없이 말한다. "이곳은 한마디로 놀이터와 같습니다. 실컷 보고, 놀고 떠들어도 됩니다. 엄숙하고 딱딱한 문화 전시공간이 아니라 누구나 즐기고 행복해할 수 있는 공간이죠."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보니 최근 들어 가수나 개그맨 등 예술가들의 발길도 잦아지고 있다. 때로는 흑인가수의 힙합 공연과 가야금 연주회를 열기도 한다. "공연이 끝날 때마다 공연자나 관객들이 함께 모여 신나게 떠들고 웃는 유쾌한 난장(亂場)이 벌어집니다. 미술과 공연 등 문화와 패션디자인이 다른 영역이긴 하지만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추구한다는 공통 분모 때문에 모두를 하나로 묶어 주는 것 같습니다."
◆예술가 VS 경영자 '갈등'
최 씨는 패션 디자이너치고는 이력이 독특하다. 목사가 되기 위해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대학시절 내내 자신의 진로에 대해 고민했단다. 그러던 중 그의 예술적 재능을 눈여겨본 목사님의 권유로 패션 공부를 시작했다. 늘 새로운 것에 목말라 하고 자신을 표현하는 출구를 찾아 헤매던 그는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길을 선택하기로 결심했다.
"갑작스럽게 진로를 바꾸는 것이 쉽지는 않았어요. 남들보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시작해서 과연 처음부터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목표를 갖고 기틀을 다져온 이들과 함께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새롭게 패션 공부를 시작하면서 비로소 제자리를 찾은 듯한 충만함을 느낄 수 있었지요."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무엇인가를 완성해 나가는 작업이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단다.
어렵게 뛰어든 패션관련 일이었지만 순탄치 만은 않았다. 한창 디자이너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면서 패션관련 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때마침 찾아온 IMF 때문에 한때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단다. 다행히 패션관련 사업이 안정기에 접어들 무렵 패션조합 문제로 법정에 서기도 하는 등 영욕이 교차된 삶이었다. 예술가와 경영자 사이에서의 갈등은 줄곧 그를 괴롭힌 난제였다.
◆열린 마음, '예술의 원천'
경영에 나서거나 패션조합 일에 관여한 것이 후회되지 않을까. "다양한 사회 경험을 하지 않고 작업만 했다면 아마도 제 작품이 편협할 수도 있었을 거예요. 그런 면에서 잃은 것보다 얻은 게 많다고 봅니다."
결국 이 같은 열린 마음 덕에 최근에는 패션뿐만 아니라 다양한 예술 간의 교류를 시도할 수 있었다. 정기적으로 영호남 미술 교류전을 열고 있다. 또 힙합 가수의 흥겨운 공연과 섹시한 누드 크로키 퍼포먼스, 가슴 따뜻한 노래와 추억으로 짜릿했던 7080가수들의 공연도 열고 있다. 그는 "문화에는 장르와 경계가 없어야 해요. 앞으로도 경계를 무너트리는 공연을 하고 싶다"고 했다.
이곳을 찾는 손님들과 대화는 그에게 또 다른 즐거움이자 창작의 원천이다. "이 공간에서 떠들어대면서 보고 느끼는 모는 것들이 다시 제게로 들어옵니다. 상상만으로도 즐겁습니다. 농부나 주부에서부터 변호사, 의사 등 다양한 사람들과 직접 만나 이야기하고 패션이나 인생에 대해 논하다 보면 절로 신이 납니다." 그는 앞으로의 인생을 이 문화 공간에 쏟아붓고 싶다고 했다. 청도의 자연에 문화를 입히고 청도를 디자인에 녹여내고 싶다고도 했다.
◆패션, '영혼을 입는 것'
"옷은 육체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옷을 입은 사람의 영혼까지 표현하는 것입니다."
비록 다양한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패션을 통해 옷을 입은 사람이 만족감과 자신만의 가치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패션 철학만큼은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고 있다. 나름 자유로워 보이지만 패션에 관해서만은 뚜렷한 철학과 원칙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문득 "대구를 대표하는 디자이너가 문화와 공연, 청도에 전념하는 동안 대구 패션계가 침체되지나 않을까"하는 걱정이 들었다. "패션도시로서 대구가 주춤하고 있다는 얘기가 많다"고 전하자 순간 그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대구의 패션 인프라는 타 지역에서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합니다. 또한 젊은 디자이너들이 더 놀 수 있는 듬직한 마당이 필요합니다." 다만, "섬유와 패션을 대표하는 도시로서 부족함이 없지만 그 기반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하는 부분에서는 아직도 헤매고 있습니다. 패션관계 종사자들의 애정과 열정이 절실할 때입니다." 대구 패션계에 대한 따끔한 지적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패션문화연구소를 나서니 산골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다. "이번 겨울엔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하죠?"라고 물으니 "무조건 따뜻하게 입어야지!"하는 답이 돌아온다. 이번 겨울, 왠지 그와 함께하는 공간은 참 따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최복호의 'FUN & 樂'은…문화와 자연, 문화예술 소통의 場
최복호 씨는 자연과 인간을 사랑한다고 했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최 씨는 '패션 디자이너라기보다 퍼포먼스 연출가나 시인, 혹은 철학가'라는 이미지가 어울린다는 평을 받을 정도로 다양한 예술과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대구패션조합 협회장, 대구미래대·경일대 교수, 패션 아카데미 회장 등으로도 일했으며 최근에는 공연, 미술 등 다양한 문화 배경을 패션으로 구현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2004년부터 파리 프레타포르테에 참가했으며 중국 CHIC 차이나 패션위크, 텍스타일 USA 등에 자연과 인간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내놓았다.
자연과 인간에 대한 그의 사랑은 패션문화연구소 입지 선정에서도 잘 드러난다. 실제 패션문화연구소는 이전까지 사과와 감이 자라던 공간이었다. 아직도 땅 한쪽엔 감나무와 사과나무가 자라고 있다. 한마디로 문화와 자연, 사람이 한곳에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패션, 의상들과 액세서리, 가방 등을 구경할 수 있도록 전시되어 있고 그 외에 갤러리, 아트숍, 공연장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와서 신명나게 보여주고 그것을 즐길 수 있다. 통유리로 시야를 확 트이게 만들어 건물 내부에서도 청도의 아름다운 자연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넓은 마당 안에는 '먼로주점'이라는 포장마차를 두어 방문객들이 쉴 수 있도록 했다.
"앞으로도 많은 예술인, 대중들과의 공통된 문화 예술을 위해 만든 'FUN & 樂'에서 다양한 문화를 기획하며 문화 예술을 위한 시간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최창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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