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엄원태의 시와 함께] 몸과 길(박진형)

자루 속에서

한 사내가 길을 꺼낸다

헐렁한 몸 속에서

줄줄이 달려 나오는

오방색 길

피범벅인 노을이

생뚱스런 얼굴을 하고

발바리 한 마리 데리고

느릿느릿 지나간다

다리가 짧은 발바리가 따라간 길을

한 여자가 기억해 낸다

붉디붉은 울음 구겨 들고

사내가 자루 속으로 들어간다

길의 끝에는 쉼 없이 바람이 펄럭인다

다시 살아봐야겠다고

중얼중얼 거리며

그렇다. 생이란 끊임없이 "다시 살아봐야겠다고/ 중얼중얼 거리며" 가고 가야 하는 몸의 길이다. '자루'는 '몸'의 메타포로 읽어도 무방하리라. 나이 들어가면서 몸이 자꾸만 헐거워지는 걸 느끼다 보니, 헐렁한 자루는 헐거워진 몸의 더할 나위 없는 비유처럼 다가온다. 그렇다면 사내가 자루(몸) 속에서 꺼내는 '오방색 길'이란 무엇인가. 시인은 그 답을 직접 말해주는 친절을 베풀지는 않는다. 마치 우리들 인생의 답이 손에 쥐듯 직접적으로 주어지지 않듯이 말이다. 시인은 다만, 엉뚱하게도 "피범벅인 노을"의 "생뚱스런 얼굴" 과 "발바리 한 마리" 같은, 그 어떤 정황만 제시할 뿐이다. 그 길이란 "다리 짧은 발바리"가 힘겹게 따라간 길이요, "한 여자가 기억해 낸" 길일 따름이다.

하지만 이 에두르는 듯한 '퍼포먼스'의 형태로 제시된 정황을 통해, 우리는 육체적 현존이라는 삶의 상처와 고단함에 직접 몸 닿게 된다. "붉디붉은 울음 구겨 들고/ 사내가 자루 속으로 들어간다"라는 언술은, 그리하여 다시 '몸의 길'인 우리의 삶이 '쉼 없이' 묵묵히 계속되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다시 살아봐야겠다고 중얼중얼 거리기도 하면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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