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낙동강시대] (17)칠곡 구왜관마을(1)

신라 토성'倭館'임진왜란'낙동강전투…1500여년 풍상과 함께 동고동락

▲하늘에서 내려다본 백포산과 구왜관마을.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하늘에서 내려다본 백포산과 구왜관마을.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300여년 구왜관을 지켜온 마을 지킴이, 향나무.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당산나무로 모셔 30여년 전까지 동제를 지내왔다.
▲300여년 구왜관을 지켜온 마을 지킴이, 향나무.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당산나무로 모셔 30여년 전까지 동제를 지내왔다.
1995년 세운 관호2리 마을 표지석. 구왜관 사람들은 왜(倭)인들이 거주한 마을이란 뜻을 ▲가진 이름을 꺼려 옆마을인 임강 옆에
1995년 세운 관호2리 마을 표지석. 구왜관 사람들은 왜(倭)인들이 거주한 마을이란 뜻을 ▲가진 이름을 꺼려 옆마을인 임강 옆에 '백포'라는 이름을 새겼다.

낙동강은 예로부터 문물과 문화 교류의 장이었다. 한반도 동쪽 내륙을 잇고, 바다 건너 외국과 교류하는 핵심 교통로였다. 땅과 영역을 확보하기 위한 세력과 국가 간 각축의 장이기도 했다.

삼한시대 진한과 변한은 낙동강 수운을 통해 낙랑'대방군으로부터 철기와 귀금속 등 대륙의 금속문물을 수입, 고대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기반을 다졌다. 신라와 가야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400여년 동안 대립의 각을 세웠고, 왜(倭)는 고려 말과 조선 전기까지 낙동강 물길을 통해 노략질을 일삼았다. 낙동강은 왜와의 교류 루트이기도 했고, 임진왜란 때 주요 격전지이기도 했다. 낙동강은 6'25전쟁을 통해 엄청난 피를 뿌린 곳인 반면 농'공업 용수 등을 공급해 근대화의 자양분이 된 곳이기도 하다.

낙동강 강마을 가운데 이처럼 오랜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 곳으로 칠곡 구왜관을 꼽을 수 있다. 칠곡군 약목면 관호2리 구왜관마을. 북쪽으로 백포산, 동쪽으로 낙동강을 끼고 있다. 관호리는 마을 앞으로 낙동강변의 깊은 못, 호수(湖)를 볼(觀) 수 있다고 이름을 붙인 것으로 알려졌다. 구왜관은 백포산이 있다고 백포라고 부르기도 한다. 유구한 세월의 역사를 담고 흘러온 낙동강, 천년이 넘는 백포산성과 이를 안은 백포산, 300여년 마을 지킴이로 풍상을 견뎌온 늙은 향나무 등은 바로 구왜관을 대변하고 있다.

◆1천500여년 역사를 머금고

구왜관은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1천500년 이상의 역사를 품고 있다.

마을 북쪽 백포산에는 삼국시대 신라토성이었던 백포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조선은 태종 17년(1417년) 왜와의 교류를 허용하면서 이 마을에 왜인들의 숙소이자, 주거지인 왜관(倭館)을 설치해 고종 때까지 운용했다. 왜는 임진왜란 당시 이 마을을 복속한 뒤 신라토성인 백포산성을 군사적 거점으로 삼았다. 6'25 당시에는 인접한 왜관철교를 중심으로 한 치열한 낙동강전투로 국군과 인민군의 피를 숱하게 뿌렸던 곳이기도 하다.

구왜관마을은 이처럼 5, 6세기 신라시대부터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가야, 왜 등과 한편으로 교류하고 한편으로 치열한 격전을 치른 역사를 안고 있다. 특히 임진왜란, 6'25 등 피로 얼룩진 낙동강의 질곡까지 지켜봐왔다.

'백포산 낮은 산등성이를 안고/낙동강은 흐른다/왜관은 관호리 동남쪽 강가에서/백포산과 혼인하여/강건너 허허한 돌밭에서/신접살림을 차렸다/갈대밭 불모지가 따뜻한 둥지를 틀 때까지/뱃고동 소리는 늘 울어야 했다/오! 낙동강/그 옛날 소금객주들의 왕국이던 긴 뱃길/50년대엔 포화 속에/쑥밭이 되었고/강물은 핏빛 되어 호국의 정령은/민족을 불렀더라/낙동강은/수줍은 강변의 산들을 가슴에 품고/동족상잔의 아픔을 씻고/구비구비 흘러간다/….'(이광수 '낙동강' 중에서)

시인 이광수(63)는 백포산과 구왜관을 배경으로 흐르는 강물의 어제와 오늘을 '낙동강'에서 노래하고 있다.

조선 초기부터 구한말까지 왜관이 설치됐던 이 마을은 20세기 접어들면서 마을 이름까지 강 건너편에 내주게 된다. 1904년 경부선 철도를 부설하면서 낙동강 건너 벌판(현 칠곡 왜관읍 석전리)에 왜관역을 세우고, 그곳을 왜관으로 부르면서 이 마을은 구왜관(舊倭館)이 된 것이다.

마을은 구왜관 나루터를 중심으로 조선 말까지 왜와의 교류 통로로, 20세기 중반까지 부산 소금배와의 교류 루트로 기능했다. 구왜관은 해방 이후 낙동강을 젖줄로 쌀농사와 축산, 1970년대 사과농사, 1980년대 이후 참외농사를 주요 작물로 삼아 21세기를 나아가고 있다.

마을 이장 최정열(72) 씨는 "강물로 농사짓고, 강 때문에 농토도 기름지게 된 거야. 먹고 살기 어렵던 시절에는 강에서 식량도 얻었지"라며 "강에 있는 '말'을 뜯어다 무쳐 먹고, 민물고기 회도 많이 먹었지"라고 말했다.

◆늙은 향나무를 모시고

낙동강이 구왜관의 젖줄이라면 마을 지킴이는 늙은 향나무이다. 마을 입구에 마른 가지를 축 늘어뜨린 채 겨우 버티고 서 있는 향나무 한 그루. 300살이 넘은 노인이다. 큰 쇠 지팡이 두 개에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다. 나무는 노쇠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하다. 하지만 구왜관 사람들에게 이 나무는 특별한 존재다.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30여년 전까지 이 당산나무에 제를 올렸고, 지금까지도 신성시 여겨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주민들은 해마다 정월 초사흗날 마을 남자들 가운데 그 해 액운이 없는 사람을 제관으로 뽑았다. 제관은 정월대보름 때까지 매일 추운 강가에서 강물에 몸을 씻은 뒤 몸가짐을 조심해야 했다. 제관이 금기해야 할 사항은 다음 해 제관이 새로 뽑힐 때까지 지켜야만 했다. 동제는 한때 향나무 옆 짚을 엮어 만든 임시 바람막이용 제당에서 지내기도 했다. 수령 300년이 넘는 향나무는 바로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지키는 신이자, 마을 제사의 대상이었다.

임형택(67) 씨는 "제관은 강물에 가서 보름 동안 목욕재계해야 하는데, 부부관계도 안하고 상가 같은 데도 일 년 동안 못 가고. 대신 제사 지낸 사람은 일 년간 부역에서 빼주고 그랬지. 마을 제사를 지내지 않은 지는 34년 됐네"라고 말했다.

새마을운동이 퍼지고, 근대화 바람이 불면서 마을제사는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사돈 상가에도 가지 못하고, 부부관계도 하지 못하는 등 일 년 간 금욕적인 생활을 감내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 때문에 누구도 제관을 맡으려고 하지 않았고, 더 이상 제관 없이 제사를 지내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제 마을 제사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정월대보름이면 주민 누군가가 명태 포 하나에 술 한 잔을 올려놓고 있다. 마을의 안녕 대신 집안의 안녕을 기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제는 없어졌지만, 향나무에 대한 외경심은 여전하다. 주민들은 이 나무가 마을 공동체를 지켜주는 존재라고 신성하게 여기고 있는 것. 나무가 쓰러지지 않도록 받침대를 세워놓고, 함부로 가지를 꺾거나 해를 가하지 않는다. 향나무를 잘 못 건드리면 본인이 해를 입을 수 있다는 인식이 퍼져 있다.

홍영표(58) 씨는 "나뭇 가지를 부러뜨리거나 손을 대면 사람이 죽는다더라. 나무를 보수도 못하고 옮기지도 못하고 있다. 가지치기를 한다거나 톱을 대거나 한 사람들은 며칠 못 살고 죽는다더라"고 말했다.

최정열 씨도 "당산나무는 손대면 안 된다고. 마을 위하는 나무인데"라고 했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공동기획:매일신문'(사)인문사회연구소

◇마을조사팀 ▷작가 안태호'이가영 ▷사진 이재갑 ▷지도일러스트 신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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