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겨울 맛이 도는 늦가을이다. 초가을이면 걸을 수 있으려나 했던 비슬산에 이제야 들어선다. 늦은 만큼 무엇보다 서두를 건 '주능선'을 분간해 내는 일이다. 그래야 가지능선(支稜)이 가려지고 산의 권역이 판별되기 때문이다.
비슬산 주능선은 북단 1,052m봉과 남단 990m봉을 양끝으로 해서 설정하는 게 좋을 듯하다. 거기서 산권을 가르는 외곽능선들이 분기해 나갈 뿐 아니라, 그 후엔 산줄기가 대폭 낮아지기도 해서다. 1,052m봉서는 앞서 본 '대구산맥'(청룡분맥)과 와와산성 및 도성암 가는 것 등 총 3개의 능선이 출발하고, 990m봉서는 큰 산줄기 두 개가 갈라져 간다. 1,052m봉은 최고봉(1,083m)서 북으로 400m 더 나가 있고, 990m봉은 강우관측소 봉우리(1,059m)서 남쪽으로 1.3km 떨어져 있다.
주능선 연결상은 1,052m봉~최고봉(1,083m)~삼봉재(905m)~극락봉(1,003m)~951m잘록이~1,018m봉(대견사터삼거리)~1,059m봉~990m봉 순이다. 남북간에 걸쳐진 이 산줄기 전체 길이는 4.7km(바닥거리 기준), 핵심인 최고봉~1,018m봉 사이는 2.5km다. 주능선 서쪽에는 달성군 유가면, 동쪽은 청도군 각북면, 북쪽은 달성군 가창면·옥포면, 남쪽에는 청도군(풍각면)·창녕군(성산면)·달성군(유가면)의 마을들이 분포했다.
주능선 양 끝 혹은 그 인근서 분기해 달리며 비슬산권을 구획하는 외곽능선은 넷이다. 북부종점 1,052m봉서 서쪽으로 뻗다가 '와와산성'에서 급락해 쌍계리(유가면) 쪽으로 가라앉는 북서편 '와와능선', 1,052m봉 남쪽 800여m 지점서 동쪽으로 뻗는 북동편 비슬기맥, 남부종점 990m봉서 서쪽으로 길게 이어가다가 '달등'(827m)을 거친 뒤 짐실마을(유가면 유곡리)로 내려서는 남서편 '짐실능선', 990m봉서 남쪽으로 내려서다가 동쪽으로 굽어 소말마을(각북면 남산1리) 서산으로 잦아드는 남동편 '소말능선' 등이 그것이다.
그 중 북서외곽 '와와능선'은 현풍면·유가면·논공읍·옥포면 등 무려 4개 읍·면을 가르는 달성군의 중요 산줄기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주능선 등산객들은 그 존재마저 모른다. 분기점인 1,052m봉이 너무 밋밋해 와와능선과의 연결 모습이 전혀 안 잡히는 게 가장 큰 원인이다. 이고개 쪽에서 오를 경우 처음으로 최고봉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지점이고, 도성암 쪽 등산객들 또한 주능선에 올랐구나 하고 환호하게 되는 지점인데도 그렇다. 정상으로 가는 여정의 일부로만 여기게 될 뿐 별개 봉우리인 줄조차 알기 힘들 정도인 것이 저 봉우리인 것이다.
그래도 만약 1,052m봉과 와와능선을 바로 잇는 등산로라도 나 있으면 상황은 달라졌을 터이다. 하지만 와와능선 길은 전혀 엉뚱한 곳으로 둘러 이어져 있다. 출발점인 1,052m봉서 바로 내려서지 못하고 청룡분맥 길을 빌려 8~9분 동안 우회하는 것이다. 그런 뒤 왼편(서편)으로 갈라져 1,052m봉 옆구리를 감아 도는 방식으로 도합 15분 쯤 후에 본래의 와와능선 흐름과 만난다. 특별하게 관심 있는 사람들이나 겨우 알만한 산길이다.
때문에 1,052m봉서 바로 와와능선 길을 찾으려 해서는 누구 없이 헛바퀴나 돌리기 십상이다. 북으로 내려서보면 청룡분맥(대구산맥) 길이고 서쪽으로 걸어봐야 도성암 뒷능선 산길로 연결될 뿐이기 때문이다. 와와능선은 저 둘의 복판에 해당하는 북서쪽으로 길 없이 누워있어 쉽게 발견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상황부터 알고 나서 도성암길 초입서 오른쪽(북쪽) 숲 속으로 생잡이 헤치고 들어가며 조심스레 방향을 잡으면 와와능선을 탈 수 있다.
이 직행 산길과 저 우회 산길은 도성암 정북에 해당하는 '범밭골' 끝 지점서 만난다. 이후 와와능선은 699m재로 푹 내려섰다가 767m봉(삼각점)으로 올라 '골내미골' 권역으로 들어서며, 머잖아 유가면 양리(유가사)와 옥포면 김흥리를 잇는 임도에 닿는다.
거기서부터 등산객들은 흔히 산줄기를 버리고 12~13분 간 임도를 따라 걸어 내려가다가 '모래재'(594m)를 통해서야 다시 능선 위로 오른다. 모래재는 유가사 쪽과 초곡리를 잇는 오래 된 고갯길이다. 거길 지나면 10분 이내에 산성 입구 안내판을 만나고, 다시 3분 정도면 671m 높이의 산성 정상에 설 수 있다. 비슬산 최고봉과 앞으로 살필 남서외곽 짐실능선 봉우리들이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서는 곳이다.
하지만 저 코스로 걸어서는 유가·옥포·논공(달성공단)이 갈리는 621m분기봉 답사는 불가능하다. 그 봉우리는 모래재 직전 지점의 마루금 위에 솟았기 때문이다. 거기서 분기하는 능선은 논공·옥포를 가르며 달리다 달성공단 동쪽 끝 '설티'를 지난 뒤 여러 갈래 지면서 낙동강변의 넓은 지형을 결정한다.
와와산성에서는 두 가지가 주목됐다. 첫째는 유천 오례산성 것과 동일한 전설이 전승되고 있는 점이다. 이 산 또한 '오리산'이며 그 이름에 착안해 적이 궁둥이 부분을 타고 올라 성을 함락시켰다는 게 그 내용이다. 둘째는, 국가기본도가 이 성을 '와우산성'이라 표기하지만 현지 안내판은 '와와(臥蛙)산성'이라 알리는 점이다. 지도가 틀렸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와와산성 이후 산줄기는 점차 낮아지다가 592m봉(삼각점)서 폭락한다. 그 밑 낮은 곳에 수백 기가 밀집했다는 고분군이 있으며, 와와산성 함락 때 희생된 장수들 무덤이라는 '팔장군묘'도 함께 자리 잡았다. 바로 아래의 양지편마을(양1리)서 그 안길을 걸어 오르면 15분 내에 도달할 수 있다. 비슬산 서부 전체 외곽능선 환종주도 흔히 여기를 들머리로 삼는다.
비슬산 주능선은 저 와와능선을 북서외곽으로 펼쳐 놓은 뒤 1,052m 북방종점을 떠나 남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곧이어 비슷한 높이의 1,054m구릉을 거쳐 1,083m 최고봉에 오른다. 간혹 해발 1,083.6m로 소개되지만 1대5,000 지형도에 분명 1,083.4m로 나타나는 봉우리다. 20cm 차가 무슨 대수냐 할지 모르나 1대25,000 지형도 방식을 따라 사사오입해 1,084m로 잘못 표기하는 수가 있으니 결코 사소하달 수 없는 일이다.
거기엔 넓고 훤히 산상 평원이 펼쳐져 있다. 그걸 주변 마을들에서는 '번치'라 불렀다. 북편 바로 아래 옥포 김흥리서는 그냥 '번치', 동편 바로 아래 각북 오산리서는 '이곡번치'라 부르는 것이다. 번치는 고원지대 평원을 가리키는 일반명사로 다른 지방서도 더러 쓰는 단어고, '이곡'은 앞서 봤듯 '이고개'의 준말이다.
비슬산 번치는 옛 사람들에게 보배 같던 곳이라 했다. 1945년에 시집 왔다는 오산리 할머니는 거기 지천으로 널린 나물을 뜯으러 드물잖게 올라 다녔다 했고, 바깥어른들은 거기서 거름으로 쓸 모풀을 베었으며, 그 길에 따라 나선 아이들은 파랗게 꽃이 핀 도라지를 캐 제사상에 쓸 수 있도록 도왔다는 것이다.
저 번치를 떠받치는 것은, 서쪽을 향해 입 벌린 고래 모양을 한 바위덤이다. 그 서편 및 남서쪽 바로 아래에는 1,036m-1,038m짜리 두 벼랑바위가 대문 양쪽 문설주같이 솟았다. 혹자는 저런 모습에서 거문고를 연상하는지, '비슬산'이란 이름이 거기서 생겼으리라 추정하는 경우도 보인다. 하지만 산 주변 마을에서 통하는 보다 오래된 명칭은 비슬산이 아닌 '비들산'이다. 앞서 닭지봉 이야기 때 봤듯, 옛날 대홍수 시대에 이 산이 모두 물에 잠기고 비둘기 한 마리 앉을 만큼만 겨우 남아 붙게 됐다는 그 이름이다. '비들'은 '비둘기'를 이곳 방식으로 발음한 '비들기'에서 파생했을 터이다.
저들 바위덤 이하에서는 대부분 기슭이 급격히 하강한다. 하지만 단 한 방향 느슨히 이어져 가는 부분이 있으니, 남쪽으로 마치 지릉 분기하듯 하는 게 그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세는 얼마 안 가 소멸되고 곧 급격히 떨어지며 대규모 벼랑바위 덤을 이룬다. 최고봉 최고임은 물론 비슬산 전체에서 가장 볼만한 경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지형이다.
저걸 일대 어르신들은 '병풍덤'(1,027m)이라 불렀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절벽 덤이 병풍처럼 최고봉 상단을 둘러쌌다는 뜻이다. 유가사를 통해 '신신골' 안으로 오르다 이정표에 '가파른 길'이라고 부기돼 있는 정상 등로(登路)를 따르면 거기 이를 수 있다. 병풍덤 속을 헤집고 최고봉으로 오르도록 연결된 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고봉 일대서 들은 그보다 더 놀라운 이름은 '궁기덤'이란 것이었다. 번치 밑 고래 입 같은 바위덤을, 그 바로 서편 아래쪽 가재마을과 내산마을서 그렇게 불렀다. '궁기'와 상관있는 봉우리라 해서 붙은 이름일 텐데 그 '궁기'는 그럼 뭘까? 혹시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관기' 스님의 이름자가 '궁기'로 변형돼 전승된 것은 아닐까? 도성스님과 도반 사이로 비슬산에 남북으로 나뉘어 살면서 절절한 우정을 나눴다는 스님이 관기스님 아닌가. 그렇다면 이 덤이야 말로 그 스님의 옛 주소일 수 있지 않을까?… 비록 헛되다 할지라도 간단히 포기하기엔 너무도 아쉬운 공상이다.
그러던 중에 고지도에서도 그 비슷한 이름이 확인됐다. 1872년 전국적으로 제작된 각 고을 지도 중 현풍현 지도가 최고봉 자체를 아예 '弓旨峰'(궁지봉)이라 표기해놓은 것이다. 아마 고지도 중 유일하게 '궁지봉'이라 표기한 게 이 그림이고, 지금까지 제대로 채록된 적 없어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름이 '궁기덤'일 것이다. 그럼 '궁기'와 '궁지'는 또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하지만 공상은 공상일 뿐, 지금 최고봉에 높다랗게 서 있는 정상 표석은 '관기봉'이 아니라 '대견봉'이다. 그 이름표는 본래 2km쯤 남쪽에 있는 1,035m봉에 붙여져 있다가 1997년에야 이리로 옮겨진 것이라 했다. 그 전 이 자리엔 1988년 이후 줄곧 '천왕봉'이라는 표석이 세워져 있었다는 것이다. 최고봉 이름을 두고 이견이 만발했음을 말하는 증거들이다.
하지만 주변 마을들을 돌아다녀 봐도 옛 어른들이 이 봉우리를 천왕봉이니 대견봉이니 하고 부르는 걸 들은 적 있다는 사람은 만날 수 없었다. 산 서쪽 기슭 양리·음리 등 달성군이나 동편 청도군 각북 어르신들 공히 "그냥 비슬산이라고만 불렀다"고 했다. 저 두 명칭이 옛 기록들을 바탕으로 지식인들이 추정한 것일 개연성을 짙게 암시하는 대목이다.
더욱이 옛기록과 고지도들로 판단한다 해도 이 봉우리의 명칭이 '대견봉'일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문화재 당국 또한 그런 판단을 내렸는지, 2.5km 남쪽에 있는 대견사 터 탑의 현지 설명문을 통해 이걸 '천왕봉'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 시리즈도 일단은 '천왕봉'이라 분별키로 했다.
천왕봉서는 남서쪽으로 한 산줄기가 내려서면서 유가사가 있는 '신신골'과 그 북편 도성암·수도암 골짜기를 가른다. 고래 입 같은 궁기덤 서쪽 끝에서 조심스레 길을 찾아 내려서면 1,038m절벽바위를 거쳐 이 능선을 탈 수 있다. 줄곧 걸어 내리면 유가사(해발415m)와 수도암을 바로 연결하는 지름길에 닿는다. 거기까지 이르는 저 산줄기를 그 아래 내산마을 어르신은 '주상등'이라 했다.
글 박종봉 편집위원
사진 정우용 특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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