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은 한 유약한 젊은이가 진정한 자아를 완성해나가는 과정을 그린 아름다운 성장 소설이다. 주인공 싱클레어는 한 동네에 사는 협잡꾼에게 시달리는 가련한 소년이었지만 데미안의 도움을 받아 강인한 내면을 소유하게 된다. 하지만 소설은 성인들도 대부분이 소년 싱클레어처럼 협잡꾼에 시달리는 가련한 군상들임을 보여준다. 그들은 불안에 못 이겨서 도피를 하며 갖가지 이름의 패거리를 짓는다. 대학생 서클과 노래 동호회, 국가의 각종 모임들이, 바로 불안에 사로잡힌 가련한 패거리들 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그 패거리들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진정한 '연대'(連帶)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연대'라는 측면에서 지난 주 11월 5일과 6일에 칠곡에서 열린 인문학 축제를 주목하고자 한다. 다소 감정의 과장이 보태지긴 했지만 나는 그 행사에서 데미안의 '연대'를 떠올릴 만큼 감동을 받았다.
칠곡군이 마련한 이번 행사의 슬로건은 '평생학습도시 칠곡! 인문학으로 소통하다'였다. 칠곡군은 2004년에 교과부로부터 평생학습도시로 지정되었다는데, 특이한 점은 일반 도시에서 흔히 하는 '평생학습'을 인문학에 중심을 맞춰 확장시켜 나가는 모습이다. 인문학 아카데미, 테마별 인문학 강좌, 인문학 여행, 찾아가는 희망의 인문학 등의 프로그램을 만들어 시민들의 호응을 받고 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금년에 열린 인문학 축제는 30여개의 학습 동아리들이 참여하는 경연대회를 열었고, 학자들이 모여 인문학 포럼을 개최하고, 칠곡 지역을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여행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그 외에 세 권의 책을 지정해 학생들과 일반인들이 참가하는 '인문학 골든벨' 행사를 가졌다.
이러고 보면 이번 칠곡의 축제가 시끌벅적한 다른 도시의 축제와 얼마나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각 도시마다 빠짐없이 개최하는 무수한 축제들은 대부분이 소비적이다. 약방의 감초처럼 인기 있는 연예인들을 초청하고, 갖가지 명찰을 붙인 '아가씨 선발대회'를 한다. 그래야 축제인 것 같다. 요즘 들어 여러 대도시에서는 왜 그렇게 '세계불꽃축제'를 많이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이에 비해 칠곡의 인문학 중심의 행사는 전혀 성격이 달라 보인다. 인문학이라는 게 원래 그렇듯이 흥밋거리도 아니고 삶에 실제적인 도움도 주지 못한다. 그럼에도 인문학이 중요한 이유는 삶의 전반적인 태도에 관여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가 있느냐, 어떤 생각이 더 옳은 것이냐를 우리에게 고민하도록 하는 게 인문학이다. 그러기에 칠곡의 축제가 눈길을 끄는 것이다.
아직 시작 단계라 그렇겠지만 아쉬운 부분이 여럿 눈에 띈다. 우선 '평생학습'이란 말은 흔하고 낡았으며, '인문학 축제' 란 명칭도 그닥 세련돼 보이지 않는다. 현대적으로 신선하게 작명하면 좋겠다. 내용면에서도 깊이와 넓이를 확충해야 한다. 어려운 일일 테지만 평소에 시민들에게 지적인 수위를 높이는 방안을 강구하는 데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공공연히 개최되는 축제는 적어도 1주일쯤 진행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걸로 목표로 삼았으면 한다. 제대로 된 인문학의 도시가 탄생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져본다. 이런 일은 오늘날 거대도시에서는 전혀 불가능하다. 작은 도시만이 꿈꿀 수 부분이다.
세계적인 테너 가수인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인구 18만명인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모데나에서 태어났다. 평범한 내륙 도시인 모데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파바로티는 57세가 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는 고향 마을에서 세계의 유명 음악가들을 불러 '파바로티와 친구들'이라는 무대를 올린다. 작은 도시에서 열린 이 음악회는 당장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해마다 음악회를 열어 수익금 전액을 자선행사에 쓰고 음악학교도 세웠다. 파바로티가 이토록 고향을 사랑했던 것은 그가 고향으로부터 참다운 감성을 얻었기 때문인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나는 칠곡의 인문학 축제에 즈음하여, 이 작은 도시에서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자신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인문학 공부를 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또한 자신도 즐겁게 참여하면서 파바로티와 같은 꿈을 갖기를 소망한다. 그리하여 작은 고향 도시 모데나가 세계의 주목을 받았듯이 칠곡에서 자란 청소년이 훗날 칠곡으로 돌아와 세계를 주목시키는 아름다운 상상을 해본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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