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당구 전국 제패 할머니 5총사

"내 나이 70줄에도 누우면 천장에 공이 굴러다녀"

포항시노인복지회관 할머니 5총사 중 최고 실력을 자랑하는 이귀자 할머니가 포켓볼을 즐기고 있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포항시노인복지회관 할머니 5총사 중 최고 실력을 자랑하는 이귀자 할머니가 포켓볼을 즐기고 있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노인생활체육 포켓볼 전국 챔피언에 오른 포항시노인복지회관 할머니 5총사. 왼쪽부터 이귀자·김정자·전진숙·이낭자·양정순 할머니.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노인생활체육 포켓볼 전국 챔피언에 오른 포항시노인복지회관 할머니 5총사. 왼쪽부터 이귀자·김정자·전진숙·이낭자·양정순 할머니.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당구를 치고 부턴 늘 웃게 됐어. 그러니 자꾸 젊어져."

포항시노인복지회관 할머니 5총사가 대형 사고를 쳤다. 이귀자(70), 김정자(68), 전진숙(70), 이낭자(68), 양정순(70) 등 다섯 할머니가 9월 29일부터 사흘간 전북 익산에서 열린 '2010 전국 어르신 생활체육대회' 당구 포켓볼(60세 이상) 종목에 경북대표로 출전해 전국의 내로라하는 강자들을 물리치고 시상대 맨 윗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큐대 한번 잡아본 일 없었던 할머니들이 당구 입문 3년 만에 일궈낸 놀라운 성적에 대회 참가자들마저도 혀를 내두르며 아낌없는 축하의 박수를 보냈다.

12일 포항시노인복지회관을 찾았을 때 할머니 5총사는 평소처럼 회관 3층 로비에 마련된 당구장에서 우아한 폼으로 포켓볼을 즐기고 있었다. 평균나이 69.2세. 그러나 인사를 건네는 할머니들의 모습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함을 느꼈다. 까맣게 염색한 머리카락과 세련된 옷차림에 얼굴엔 미소를 지으며 반겨준 할머니들은 백발노인을 생각했던 기자의 상상을 곧바로 허물어뜨리고 말았다.

"당구를 하면 저절로 젊어져. 우리처럼 만날 웃게 되거든."

할머니들은 긴 큐대로 둥그스름한 공을 제대로 맞히려면 머릿속에 잡념이 생겨선 안 된다고 했다. 전진숙 할머니는 "조금만 신경이 쓰이는 일이 있으면 그날은 공을 헛치는 경우가 많다"며 "둥근 공처럼 치는 사람의 마음도 둥글둥글해야 편안하다"고 했다. 그러니 할머니들은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웃고, 걱정거리가 있어도 훌훌 털어버린다.

"어느 구멍에 공을 넣을까 허리를 숙이고 쳐다보고 있으면 머리가 깨끗해져. 오로지 공 넣을 생각밖엔 나지 않거든. 제대로 공을 넣으려면 올바른 자세부터 공이 맞는 각도, 힘 조절 등을 집중해야하니 머리가 바쁘게 돌지. 그러니 늙지도 않아. 그래서 당구가 노인들에게는 최고의 운동이지."

당구 예찬론에 빠진 할머니들이지만 당구를 시작한 건 불과 3년밖에 되지 않는다. 더욱이 양정순, 이낭자 할머니는 지난해부터 당구를 쳤다. 자식들 키우고 먹고 사느라 평생 딱히 내세울 취미가 없었던 할머니들은 3년 전 복지관에 포켓볼 당구대가 들어오면서 이 운동을 접했다. 어떻게 공을 맞춰야하는지, 경기는 또 어떻게 하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큐대를 잡았지만 처음부터 당구가 재밌기만 했다.

이상봉(72) 할아버지가 포켓볼 회장에 취임하고, 코치 겸 감독으로 할머니들에게 당구를 가르쳐주자 실력이 조금씩 나아졌다. 손가락으로 큐대를 지지하고 스트로크를 수십, 수백 번씩 반복하자 두 석 달 후에는 원하는 방향으로 공을 똑바로 보낼 수 있었다. 공을 맞히기 시작하자 늘 당구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누워있을 때면 천장이 당구대로 보이고, 머릿속에선 공들이 왔다 갔다 했다.

전문적인 강사도 없었지만 책으로 배운 것을 연습으로 실천하며 실력을 키워나갔다. 회원들 스스로 터득한 기술이었기에 단합은 전국 최고가 됐다. 의기투합해 첫 도전에 나선 지난해 대회. 뜻밖에도 결승까지 올랐지만 제대로 배운 서울 팀에 맥없이 졌다.

이상봉 회장은 그날로 전국제패 꿈을 꾸며 대회 공고가 뜨자마자 선수를 선발했다. 120명의 회원들 중 평소 눈여겨본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포켓볼 경기는 남녀 누구든 상관이 없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맞붙게 될 때는 할아버지에 핸디캡이 적용돼 10점을 더 내야하기 때문에 전원을 할머니로 구성했다. 이낭자·양정순 할머니는 짧은 경력에도 집중력과 슛의 예리함을 지켜봤던 이 회장의 추천으로 대표 팀에 합류했다. 대회 40일 전부터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맹훈련을 됐다. 이런 노력은 고스란히 결과로 이어졌다. 예선을 통과해 오른 결승. 공교롭게도 상대는 지난해 우승을 내준 서울 팀. 하지만 1년이 지난 뒤 실력은 반대였다. 흰 공으로 지정한 공을 쳐서 지정한 구멍에 공을 넣어야 득점이 인정되고, 먼저 20점을 내야 경기에서 이긴다. 이런 경기방식으로 5명이 동시에 1대1로 경기를 펼쳐 먼저 3경기를 따내야 승리하게 된다. 경북 팀은 결승에서 20대2, 20대4, 20대7로 일방적인 승리를 거뒀고, 나머지 2경기도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경기를 끝냈다. 예선부터 결승까지 단 한 세트만 내준 완벽한 챔피언 등극이었다.

할머니들은 "평생 그때처럼 짜릿한 순간은 없었다"며 당구를 시작하면서 찾게 된 인생의 즐거움을 쏟아 냈다.

한번 쳤다 하면 10점 씩을 올리는 이귀자 할머니는 "부끄러움이 많아 남 앞에서는 이야기도 잘 못했는데 당구 때문에 활발해졌다"고 했다. 이낭자 할머니는 "남편과 함께 복지관에 출근(?)해 좋아하는 댄스와 체조, 요가 등 여러 스포츠를 즐기며 건강을 다질 수 있어 더없이 좋다"고 했다. 전진숙 할머니는 "예전엔 당구는 건달들이 치는 운동으로 생각했는데 정말로 우아하고 멋진 운동"이라며 "여럿이 모여 하다 보니 단결심이 생겨 이제는 자매처럼 지내게 됐다"고 했다. 양정순 할머니는 "당구를 치면 점심을 먹었는데도 오후 3시만 되면 배가 고플 정도로 많은 운동이 돼 건강하게 지낼 수 있게 됐다"고 했다. 김정자 할머니는 "내가 치는 걸 옆에서 구경하면 스타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좋다"고 했다.

무엇보다 할머니들은 당구를 치느라 자주 외출을 하게 되면서 곱게 옷도 차려입고 화장도 하게 돼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고 했다. "동네 골목에서 흰머리가 성성한데다 헝클어진 머리에 몸뻬를 입은 동갑내기를 보면 진짜 할머니 같은데, 우린 좀 세련돼 보이지 않느냐"며 웃음꽃을 터뜨렸다.

최두성기자 dscho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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