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에 벼슬이 판서까지 오르며 서인(西人)을 영도한 인물 중에 홍성민(洪聖民)이란 사람이 있었다. 1591년 서인의 영수 정철이 실각하자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를 떠났다. 가산을 정리하여 말 몇 마리를 구해 현지에 도착했으나 식량이 금방 바닥났다. 먹을 것이 없어 마을 사람과 의논하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바닷가에는 곡식은 귀하나 소금은 흔하고, 오랑캐 땅에는 곡식은 풍부하나 소금은 부족하오. 바닷가 소금을 사다 오랑캐의 곡식과 바꾸면 그 이문이 밑천으로 들인 곡식보다 몇 갑절이나 남을 것이니 식량 걱정은 안 해도 될 것이오." 선비가 차마 이 짓을 못하고 주저하고 있는데 창자에서 소리가 나자 할 수 없이 종을 시켜 장사를 시켰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굶는 것에 비하면 부끄러움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선비는 장사치나 농사꾼과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 여겼는데 이젠 장사치 노릇을 하면서도 이를 달게 여기고, 농사꾼이 되는 것은 감히 바라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었음을 한탄하게 된다.
홍성민의 '소금을 팔아 곡식을 산 이야기'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글이다.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실용 경제 사상을 도입한 것이 다산 정약용을 필두로 한 실학파들인데 이보다 200년이나 앞선 선비가 '시장 경제'를 몸소 경험했다니 놀랍다. 그리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것을 글로 남긴 용기(?)가 돋보인다.
영원히 선비의 나라로 남을 것 같았던 한국이 G20 회의를 개최하고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에 올라선 것은 불과 몇십 년 만의 일이다. 물론 서구 경제학과 민주주의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만 선조들의 이런 경세제민(經世濟民) 철학 밑거름 없이는 성취 불가능한 것 아닌가. 우리의 토종 실학(實學) 사상이 새롭게 대접받아야 할 이유다.
최근 이헌조 전 LG회장이 사재 70억 원을 실학 연구 단체에 기증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돈이 없어 연구 단체를 접으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거액을 내놓았다고 한다. 한국경제의 뿌리인 실학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한 무언의 '경고장'이다.
다산 정약용은 한강 배다리를 가설했고 수원 화성을 설계했다. 거중기를 만들었고 종두법 연구는 물론 직접 실험도 했다. 혁신 없이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오늘날, 그 생존 법칙을 우리의 실학에서 찾으라는 노(老) 기업가의 절규가 들려오는 것 같다.
윤주태(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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