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 낙동강 시대-스토리가 흐르는 마을] (18) 칠곡 구왜관마을 <2>

"왜란 마을 이름 버리고, 민족정기 서린 백포로 부르면 얼마나 좋겠어요"

칠곡군 약목면 관호2리 구왜관은 '왜(倭)'와 '백포(柏浦)'가 줄곧 갈등해온 마을이다.

그 보이지 않는 갈등은 조선 초기와 중기에서 비롯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구왜관의 지명은 조선 초기 낙동강변에 설치된 왜인들의 교역 공관, 왜관(倭館)에서 따왔다. 구왜관에는 마을 지명뿐 아니라 삼국시대 쌓은 백포산성이 왜성으로 불리고, 왜성모퉁이의 부정적 이미지도 여태 남아 있다.

상당수 주민들은 이 때문에 마을 이름도 구왜관 대신 마을을 둘러싼 백포산과 백포산성을 따 '백포'로 불리길 원하고 있다. 백포는 조선 중기 의병 조직과 제도 개혁에 상당한 역할을 한 문신, 채무(蔡楙;1588~1670)의 호이기 때문이다. 구왜관은 이처럼 부정적 이미지를 지닌 왜와 선비의 기개를 내포한 백포가 충돌하면서 변화해온 마을이다.

◆백포산과 산성

백포산은 해발 110m의 나지막한 산이지만, 유구한 역사와 숱한 질곡을 간직한 산이다. 백포 채무가 정계에서 물러나 여생을 보낸 지역이어서 백포산으로 불린다. 백포는 병자호란 때 고향에서 의병을 조직해 남한산성으로 향했고, 세금과 부역을 줄이고 제도를 개혁하는 등 선정을 베푼 문신.

삼국시대 백포산에 쌓은 산성이 백포산성인데, 약목면 관호리 지명을 따 관호토성 또는 관호산성으로도 불린다. 내성(內城)은 동서 18m, 폭 50m 정도이고, 외성(外城)은 북쪽에 흔적만 남아 있다. 성의 동쪽과 남쪽은 절벽 아래 낙동강이 흘러 자연지형을 그대로 활용한 셈이다. 경북대박물관 조사에 따르면 산성은 삼국시대 신라가 쌓은 토성으로, 지금도 성터 곳곳에 삼국시대 토기 조각 등이 발견되고 있다.

백포산성은 조선과 근대로 넘어오면서 커다란 상처와 아픔을 겪었다. 각종 기록이나 주민들의 전언을 감안할 때 산성은 조선시대 왜관에 머물렀던 왜인들이 새로 돋우고, 임진왜란 당시 왜인들이 군사거점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주민 상당수는 이 산성을 삼국시대 신라인이 아닌 조선시대 일본인들이 쌓은 성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이재수(69) 씨는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여 있었던 거라. 그래 이순신 장군이 스윽 둘러보고 돌아갔단 얘기가 있거든. 왜놈들이 진을 쳤응께 왜성이라캤지"라고 말했다.

또 '조선지' '칠곡지' 등에는 왜인들이 교역을 하면서 상품의 밀거래나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 조그마한 야산(백포산)에 돌과 흙으로 왜관 담장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왜인들이 물품을 쌓아 보관하고, 이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기존 토성을 보수했을 것으로 점쳐진다.

산성은 또 60년대 제방공사 과정에서 많이 허물어진 것으로 보인다. 제방공사에 사용된 돌 대다수가 이 산성터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김윤수(73) 씨는 "산성에 돌이 많았는데, 산마루에서 밑으로 굴려가지고, 소달구지에 실어다가 돈 벌었지. 사촌형님이 소 구루마를 가지고 돌을 빼다가 (제방공사) 현장에 가져가고 그랬다"며 "공사현장에 실어 주면 그 돌로 방천을 쌓았다고. 돈 준다 캐니께 내나 없이 다 몰려서 돌을 뽑았지"라고 말했다.

"그때 돈 많이 벌어 묵었다. 돌 빼가 팔면 요새로 말하자면 하루 일당 돈 십만원 정도라. 산에서 밭에다 막 굴린기라. 돌 빼내면 순서대로 굴린기라. '요번에는 내 굴린다. 다음에는 니 굴리라' 하는 식으로. 성 그거 무너뜨리고 그러는데 관에서 암말도 안했어. 왜성이니까 그대로 둔거라."

이재수 씨도 백포산성의 돌이 낙동강 제방공사에 대다수 사용됐다는 증언을 실감나게 설명했다.

백포산성은 그렇게 삼국시대 토성에서 조선시대 왜인들의 군사거점과 왜관의 상품 보관창고, 근대 낙동강 제방의 골재로 활용되면서 1천500여년을 이어왔다.

◆왜성모퉁이, 침류대와 귀신바위

낙동강과 함께 구왜관의 대표적 상징인 백포산은 왜성모퉁이와 침류대, 귀신바위 등의 흔적과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주민들은 백포산 동쪽 끝 지점과 낙동강 양수장이 맞닿은 곳의 가파른 절벽 모서리를 '왜성모퉁이'라고 한다. '왜가 쌓은 성의 모퉁이'란 뜻이다.

왜성모퉁이는 낮과 밤을 통해 긍정과 부정의 이미지를 각각 가진 지형을 갖고 있다. 왜성모퉁이 절벽 위 침류대는 마을 어른들이 낮에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절벽 위 넓은 공터에서 마을 훈장과 어른들이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읊었다고 한다.

김윤수 씨는 "왜성모퉁이 절벽 위 소나무 옆에 크고 평평한 바위가 침류대인데, 글씨(시)도 쓰고, 놀기도 하던 그런 데였다"며 "옛 어른들이 풍류를 즐기던 큰 바위였는데, 세월이 흘러 많이 깎여나갔다"고 말했다.

귀신바위는 왜성모퉁이 절벽에서 밤이면 귀신이 보인다고 마을사람들이 붙인 이름이다.

홍영표(58) 씨는 "강에서 배를 타고 손전등을 비추면서 가는데, 바위 위에 하얀 소복을 입은 여자가 서 있는 거라. 날이 흐리고 비가 부슬부슬 오는 날 제일 선명하고, 달빛 있는 날은 으스스하게 보인다"고 말했다.

다른 주민들도 낮이 아닌 밤에, 맑은 날이 아닌 비오는 날에 귀신처럼 보이는 바위여서 밤에는 왜성모퉁이를 잘 다니지 않는다고 했다.

왜성모퉁이 절벽 아래에는 또 자그마한 도로 준공비가 하나 있다.

4음절, 7행으로 된 이 비석 문구를 풀이해보면, '산이 험하고 강이 가로막아, 여기에 이르러 통하지 않으니, 위의 집은 새들의 길이요, 아래 (낙동강) 흐름은 용궁이라, 관과 민이 함께 힘을 모아/천 번을 실어 나른 후/공사의 마침을 기록한다'로 돼 있다.

새들의 길, 용의 궁이란 표현을 통해 옛 어른들의 풍류와 재치가 돋보이는 준공비이다.

이 비석은 주민들이 일제 강점기인 1941년 11월 왜성모퉁이 앞길이 좁고 위험해 시멘트 길을 내면서 비를 세웠는데, 70년대 양수장을 건립하면서 원래 있던 비와 받침돌을 깎아내는 과정에서 허물어진 바람에 별도로 세운 것이다.

김윤수 씨는 "왜정 때 몇몇 유지들이 돈을 내 길을 닦았어. 돌을 세웠는데, 뒤에 양수장 공사를 하면서 무너지는 바람에 탁본을 해 새로 만들었다고. 건설사에 요구해 돈을 좀 얻어가지고, 석물공장 하는 내 친구한테 얘기해 비를 새로 세웠거든"이라고 했다.

◆구왜관나루터와 어부

마을에 접한 낙동강의 상류쪽 왜관철교 인근에는 고대부터 나루가 있었다. 구왜관나루터는 예부터 사람들의 이동수단, 소금배를 비롯한 물자 교역 등 교통'물류의 핵심 통로로 활용됐다.

하지만 1930년대 중앙선과 경북선이 개통되면서 경북 북부지역 화물량이 줄고, 1941년 기존 경부선 왜관철교가 국도(왜관교)로 바뀌면서 나루는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1904년 부설된 경부선이 41년 복선화되면서 왜관철교가 상류 100m 지점으로 옮겨 가설되고, 기존 왜관철교는 사람과 차량이 다닐 수 있는 왜관교(현 호국의 다리)로 활용됐던 것. 뱃길 대신 이동이 편리한 다리가 생기면서 나루는 자연스럽게 이용률이 떨어지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왜와의 교역통로로, 부산 소금배 및 강 건너 마을과의 교통로로 기능했던 구왜관나루터는 해방 이후 고기잡이배의 통로로만 활용됐다. 80년대 후반까지 구왜관에는 배를 활용해 고기를 잡는 어부들이 꽤 있었지만, 지금은 매운탕집을 운영하는 홍영표 씨가 유일하다.

홍 씨는 "지금은 고성능 엔진으로 움직이지만, 옛날에는 노 저어 고기 잡고, 돛으로 바람타고 움직였지"라며 "구미공단이 점차 확대되면서 80년대 후반 물이 크게 나빠져 잉어회도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했지"라고 말했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공동기획:매일신문 (사)인문사회연구소

◇마을조사팀 ▷작가 안태호'이가영 ▷사진 이재갑 ▷지도일러스트 신지혜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